어떤 불륜은 한 나라를 구한다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1443년 어느 날 밤, 파티장에서 늘 그렇듯 취해 있던 샤를 7세 앞으로 새하얀 얼굴에 빨간 입술을 지닌 여성이 나타났다. 왕비의 새로운 시녀였다. 천하의 색골 샤를 7세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런데 당돌한 이 소녀, 왕 앞에서 겁도 없이 외쳤다. “폐하, 조국 프랑스가 영국에 넘어갈 위기입니다.”
소녀의 이름은 아녜스 소렐. 후에 왕의 정부가 되는 여자다. 프랑스 학계는 그녀가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일부 역사학자는 “잔 다르크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왕의 애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위기의 단초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평가는 이례적이다. 그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던 샤를 7세
“잔 다르크도 가고”…패색 짙던 백년전쟁
아녜스를 만나기 전 샤를 7세는 하루하루 고주망태로 보냈다. 백년전쟁 후반기 영국의 기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영국 왕 헨리 5세의 영웅적 활약으로 프랑스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했다. 선대왕 샤를 6세는 딸 카트린을 헨리 5세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아들을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는 굴욕적인 ‘트루아 조약’에까지 서명했다. 왕세자였던 샤를 7세는 영국 혈통 조카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처지였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잔 다르크다. 1429년 4월 17세의 소녀가 “신이 프랑스를 구하라는 계시를 내렸다”면서 왕에게 겁 없이 자신에게 군사를 맡길 것을 제안했다. 샤를 7세와 정치·종교 지도자들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녀를 전장에 내보냈다.
잔 다르크는 루아르에서 승리를 거두고, 랭스까지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왕들이 대대로 대관식을 치르는 장소였다. 우리나라로 빗대자면 임진왜란에서 한양을 수복하고 경복궁을 다시 손에 넣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마침 영국의 영웅 헨리 5세가 35살 나이로 요절한다. 프랑스 왕위를 잇기로 예정된 아들 헨리 6세는 한 살이 되지 않은 신생아였다. 샤를 7세가 트루아 조약을 무시하고, 가까스로 왕위에 다시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전쟁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 지역인 부르고뉴는 노골적으로 영국 편에 섰다. 전장에서 붙잡은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긴 것도, 처형한 것도 그들이었다. 잔 다르크는 죽었고 프랑스의 금싸라기 땅인 노르망디와 앙주 지방은 여전히 영국 손아귀에 있었다. 결국 샤를 7세가 의지한 건 ‘술과 여자’. 이때 아녜스 소렐이 나타났다.
왕비의 시녀에서 왕의 정부로
프랑스 곳간 다시 채워 넣은 수완
아녜스 소렐은 왕비 ‘마리 드 앙주’의 시녀였다. 절세미인 20세 여인에게 샤를 7세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전쟁에 지친 심신을 달래줄 여인이라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샤를 7세는 진지한 마음으로 구애를 펼쳤고 아녜스 소렐은 그의 애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신하로서 조국 편에 서시지요.”
아녜스 소렐은 국정을 ‘농단’하는 경국지색이 아니었다. 당대의 미인이었지만, 동시에 현명한 여인이었고 또 애국자였다. 국고를 튼튼히 함과 동시에 샤를 7세를 각성시키는 촉매 역할을 자처했다. 프랑스를 분열로 몰아넣은 귀족들을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고, 부유한 상인들에게 군자금을 요청하기도 했다. 귀족과 상인 무리는 아녜스 소렐의 미모와 화술에 넘어갔다.
1441년 프랑스군이 샹파뉴를 수복하고, 1450년에는 포미니 전투에서 대포를 이용해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프랑스가 대포로 무장한 자금 역시 아녜스 소렐이 국가 재정을 튼튼히 만들어놓은 덕분에 가능했다. ‘칼레(그 유명한 아퀴스트 로댕의 조각 작품 ‘칼레의 시민들’의 배경)’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를 몰아냈다. 이처럼 샤를 7세가 ‘승리왕(le Victorieux)’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잔 다르크와 아녜스 소렐 두 여인이 있었다. 멍청한 왕이었지만 여자 복은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 아녜스 소렐은 ‘경국지색’ 대신 ‘부국지색(나라를 부강하게 한 미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위인이었다.
지금도 지도자 연애에 우호적인 프랑스 국민들
샤를 7세의 아녜스 소렐 사랑은 시쳇말로 ‘찐’이었다. 궁정에서 백년전쟁을 지원한 아녜스 소렐을 1444년 왕의 공식 정부인 ‘메트레상티트르’로 임명했다. 영어로는 ‘로얄 미스트리스’. 우리말로는 왕의 공식 애인이다. 직함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대내외적으로 왕의 연인임을 선포한 셈이다.
이제 궁의 정치는 아녜스 소렐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귀빈을 맞을 때 왕의 옆자리는 왕비가 아닌 정부 아녜스 소렐이 차지했다. 기독교 국가에서 아내를 두고 ‘왕의 연인’이라는 자리를 만든 것만으로도 샤를 7세가 그녀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다. 왕비였던 마리 드 앙주로서는 시녀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까지 지켜봐야만 했다.
샤를 7세는 아녜스 소렐에게 왕실의 재산인 로슈성까지 하사했다. 성은 보퉤쉬르마른, 아름다움의 궁전이라고 불렸다. 마리 드 앙주의 분노가 어떤 정도였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울화가 전해져서였을까. 그의 아들 루이 11세는 즉위 후 이 성을 감옥으로 바꿔버렸다.
아녜스 소렐은 백년전쟁 막바지인 1450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28살. 샤를 7세의 넷째 아이를 출산하던 중이었다. 더구나 그는 왕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노르망디 주미에르 지역까지 이동하고 있었다. 그가 왕에게 얼마나 힘을 실어주려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프랑스 왕궁과 사교계에서는 루이 11세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프랑스 시민은 지금도 자국 정치 지도자 연애에 유독 관대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갖는다. 지도자가 이혼을 하든 불륜 행위를 하든 나이 차이가 심한 여성과 결혼하건, 프랑스 시민은 ‘사생활’이라며 일축한다. 대한민국에서라면 ‘스캔들’이라는 딱지가 붙고 ‘퇴진’ 구호가 울려 퍼졌을 일인데.
아녜스 소렐과 같은 불륜녀들 활약이 국가 리더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의식의 기반이 된 건 아닐런지. 리더의 불륜이 잉글랜드로부터 조국을 지킨 나비효과를 불렀으니 말이다.
물론 불륜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역사 애호가의 치기 어린 ‘사색’일 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7호 (2024.07.10~2024.07.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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