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말 한마디에 체포된 야구 감독, 웃지 못할 흑역사

이준목 2024. 7. 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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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이준목 기자]

삼미 슈퍼스타즈(1982-1985)는 한국 프로야구 KBO리그의 출범 원년을 함께한 6개 구단 중 한 팀이자, 최초의 인천 연고 구단이다. 약 4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 속에서 야구팬들에게 삼미의 이미지는 대체로 초라한 성적으로 인한 '꼴찌의 대명사' 정도로만 기억된다.

하지만 오늘의 수많은 패배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내일의 승리를 기약하던 약자들의 도전정신, 그러한 언더독들을 꿋꿋이 응원해주던 팬들의 열렬한 사랑은, 어쩌면 우리가 결과보다 과정을 통하여 스포츠에서 진정한 감동을 느끼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삼미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매순간 1승에 목말랐던 만년 꼴찌팀의 투혼은, 오랜 세월이 흘러 오늘날까지도 야구팬들에게도 회자될만큼 묘한 여운을 남겼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역사
 
 삼미 슈퍼스타즈
ⓒ SBS 갈무리
 
7월 11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는 '영원한 나의 슈퍼맨, 운명을 건 세 번의 승부'편을 통하여 삼미 슈퍼스타즈의 역사를 조명했다.

1982년 3월 서울 동대문 야구장. 당시 사진학을 전공하고 있던 대학생 이광진씨는 경기장을 찾아 평소 응원하던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들의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당시는 한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한 원년이었다. 언젠가 광진 씨는 프로야구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광진씨의 모습은 우연히 삼미 슈퍼스타즈의 단장이던 이혁근 상무이사의 눈에 띄었다. 광진씨의 사진에 큰 흥미를 느낀 이혁근 단장은, 광진씨에게 삼미의 모든 경기에 무료로 출입이 가능한 비표(현재의 ID 카드)를 제공하고, 선수단과 같은 버스로 이동할 수 있는 조건으로 삼미 슈퍼스타즈의 모든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전담 사진사로 채용했다.

좋아하는 야구와 사진촬영을 함께할수 있어서 마냥 행복했던 광진씨는, 어느날 문득 무언가 허전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광진씨의 최초의 프로야구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결정적인 장면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승리의 환희'였다.

"스포츠 사진은 어떻게 보면 환희다. 이겼을 때의 그 환희. 근데 저는 환희보다는 갈등 사진이 극적인 것보다는 침울한 사진이 더 많아서 아쉬웠다."

광진씨의 회상이다.

당시 삼미 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꼴찌의 대명사였다. 득점 보다는 실점이 많고, 승리보다 패배에 익숙했던 만년 꼴찌팀이었다. 불꽃처럼 짧은 역사를 남기고 사라진 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겐 팀의 마스코트, 아직도 빛나고 있는 '슈퍼맨' 같은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시간은 프로야구 출범 1년전인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군사정권에서는 국민들의 정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프로야구를 만드는 계획을 추진한다. 돈이 많은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기 위하여 민간 기업에 운영을 맡기고 기업은 홍보를 위해 야구단을 이용하는 구조였다.

지역에 연고가 있는 민간 기업이 해당 지역 출신 선수들을 모아 6개의 팀을 만들기로 했다. 서울엔 MB C청룡, 충청도엔 OB베어스, 대구에 삼성 라이온즈, 부산엔 롯데 자이언츠, 광주엔 해태 타이거즈. 이렇게 다섯 지역의 팀이 정해졌다.

그런데 아직 한 팀이 부족했다. 유일하게 정해지지 않은 인천, 경기, 강원 지역을 맡을 기업이 필요했다. KBO 관계자들은 현대, 대한항공 등 여러 기업도 접촉했지만 줄줄이 협상이 불발됐다. 그렇게 프로야구 출범 발표일을 불과 보름 앞두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KBO에, 갑자기 한통의 전화가 걸려오더니 자신이 프로야구팀을 만들어보겠다고 먼저 제안한 이가 있었다.

전화의 주인공은 김현철 삼미 그룹 회장이었다. 삼미 그룹은 무역업, 해운업, 특수강을 취급하는 회사로 당시만해도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었다, 김현철 회장은 미국 유학 시절 메이저리그를 즐겨보며 야구팬이 되었고, 우연히 인천 지역 야구팀을 맡을 기업이 없다는 뉴스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어서 출사표를 냈던 것. 당시 30세 젊은 CEO였던 김 회장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마침내 인천 연고의 프로야구팀이 처음 탄생하게 된다.

문제는 프로야구 개막인 1982년 3월까지는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단 것. 다른 구단보다 늦게 출발한 삼미는 촉박한 시간 속에서 다급하게 팀을 만들어야만 했다.

팀 이름이 '삼미 슈퍼스타즈'가 된 것은 김현철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김 회장은 미국 유학 시절 NBA(미프로농구)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 팀명을 제안했다. 마스코트도 팀 이름이랑 어울리게, 슈퍼맨과 원더우먼으로 정했다. 사령탑으로는 한국야구 1세대 홈런왕이자 아시아의 철인이라 불리던 박현식씨가 낙점됐다.

이어 삼미는 양승관, 김무관, 김광옥, 조흥운, 김재현 등 23명의 선수들을 끌어모으며 역사적인 원년 멤버들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모인 선수들은 과연 이 팀이 제대로 경기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삼미는 다른 팀과 비교하기 힘들만큼 전력이 허약했고, 선수층도 얇았다. 감독은 창단 후 첫 경남 진해 전지훈련에서 프로 레벨이 아닌 선수들의 실력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이러니하게 '슈퍼스타 없는 슈퍼스타즈'의 도전이 막을 올렸다.

박 감독은 전지훈련 기간중 한 명의 배팅볼 투수를 눈여겨보게 된다. 그는 모기업인 삼미 특수강에서 근무하고 있던 일반 회사원으로, 실업 야구팀 입단에 실패하여 일반 회사에 취직했고 직장인야구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선수단 훈련을 지원하기 위하여 모기업에 파견을 나왔던 그 직원은, 좌완이라는 희소성과 준수한 구위, 성실한 성품으로 전지훈련 기간동안 감독의 눈에 띄어 정식 입단 제의를 받게 된다. 덕업일치를 이뤄낸 그가 바로 훗날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실제 모델이 되는 삼미의 투수 '감사용'이다.

프로야구 출범, 데뷔전 치른 삼미 슈퍼스타즈
 
 삼미 슈퍼스타즈
ⓒ SBS 갈무리
 
1982년 3월, 마침내 대한민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한다. 삼미는 프로야구 개막식 다음날인 3월 28일 삼성 라이온즈와 대구에서 역사적인 데뷔전을 치른다. 당시 대한민국 프로야구 1호 홈런의 주인공인 '헐크' 이만수를 비롯하여 이선희, 배대웅 등 국가대표급 선수진을 보유한 삼성은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하지만 삼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접전을 펼치다 5대 3으로 원정에서 삼성을 잡는 이변을 일으킨다. 창단도 급하고 준비도 어설펐던 삼미의 깜짝 첫 승은, 선수들조차도 예상못한 뜻깊은 순간이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줬다.

그러나 삼미의 기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삼미는 4월들어 11경기를 치르는 동안 2승 9패의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선수층이 너무 얇았던 삼미는 투수가 부족하여 연투가 다반사였고, 야수들은 체력과 실력이 부족하여 이준근 타격코치가 대타로 타석에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특히 감사용은 당시 한 시즌 80경기 중 무려 절반이 넘는 41경기에 출전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미는 매일같이 패배를 거듭해야 했다. 전담 사진사인 광진씨가 촬영했던 수많은 사진 속에서 대부분 선수들이 웃음기 하나 없거나 넋이 나간 표정만 가득했던 이유였다. 패배가 거듭되자 선수들도 부끄러움에 늘 고개를 숙였고, 팬들은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프로 원년 삼미는 6개 구단 중 6위로 이변 없이 꼴찌를 기록했다. 삼미는 최소 득점, 최소 안타, 최소 홈런, 최다 실점을 기록했고, 시즌 80경기에서 단 15승만 거두며 프로야구 42년 역사상,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188의 최저 승률 기록까지 수립했다. 팬들은 당시 삼미 슈퍼스타즈의 별칭을 '슬퍼스타즈'라고 불렀다.

당시 프로야구 응원문화는 지금과 달리 매우 과격했다. 관중이 선수한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쓰레기를 투척하고, 그물망을 타고 넘어가 경기장에 난입해 항의하는 등 각종 난동이 다반사였다. 특히 삼미처럼 매일같이 패하는 팀은 그만큼 팬들에게 비난을 드는 것이 숙명이었다.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도 삼미 팬들은 '꼴찌팀 팬'이라고 놀림의 대상이 되었으며, 삼미의 어린이 팬들은 창피해서 삼미 유니폼도 못 입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맨날 지기만 하는 '약골 슈퍼맨'을 꿋꿋하게 계속 응원하는 의리의 팬들도 존재했다. 당시 삼미 어린이팬이었던 김훈희씨는 "만약에 내일 내가 야구장에 안 왔는데 그날 이기면 어떡하나. 내가 삼미가 이기는 걸 한번 봐야 되니까. 그래서 내일도 또 야구장을 찾게 되는 거"라고 회상했다.

아픔의 첫해를 마치고 1983년, 삼미는 스토브리그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선택한다. '인천 야구의 대부' 김진영 감독이 지휘봉을 잡아 기존 선수 중 11명을 단칼에 방출하는 선수단 정리 작업을 단행했다. 또한 전년도 꼴찌의 혜택으로 1차 선수 지명권을 가진 삼미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계약금 4천, 연봉 4천을 주고 주고 재일 교포 에이스 투수 장명부를 영입한다. 이는 당시 국내 최고 에이스 투수였던 OB 박철순의 두 배에 이르는 몸값이었다.

그런데 장명부는 정작 시범 경기에서는 연이어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많은 이들의 의구심을 자아냈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자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시범 경기 때 일부러 안타를 맞아가면서 국내 선수들의 전력을 분석한 장명부는, 정규시즌들어 비로소 진짜 실력을 발휘하며 타자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구위에 빈볼과 심리전도 마다하지 않는 영악한 경기운영능력에 장명부에게는 '너구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삼미는 장명부가 나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승리를 거뒀다. 에이스 장명부를 등에 업은 슈퍼스타즈는 5월까지 벌써 21승을 거두며 전체 1위에 오르는 '언더독의 반란'을 일으켰다. 지난해 숨죽이듯 살아야했던 팬들도 자신이 삼미 팬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인증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프로야구는 전후기리그로 나뉘어 있었고 전반기 우승팀은 후반기 성적과 상관없이 한국시리즈 직행이 가능했다. 삼미는 전반기 1위를 노릴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6월 1일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애매한 판정논란으로 승리를 날린 것이 치명타가 됐다. 당시 김진영 감독은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가 심판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인 6월 2일, 김진영 감독이 많은 관중 앞에서 욕설과 폭행으로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쳤다는 혐의로 덕아웃에서 체포되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하필 문제가 된 경기를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TV중계로 보고 있었고, 김 감독이 항의하는 모습에 "저러면 되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다음날 서울 경찰이 부산까지 내려가면서 현직 프로야구 감독을 체포하여 신문 1면에 나오는 사상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권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웃지못할 사건이었다.

큰 타격을 입은 삼미는 결국 전반기 1위에 실패했고 2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후반기에도 아쉽게 2위를 하며 그토록 열망했던 한국 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삼미 슈퍼스타즈
ⓒ SBS 갈무리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1983년에 장명부가 30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무려 42년 동안 깨지지 않으며 프로야구 역사상 불멸의 기록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삼미의 짧지만 찬란했던 화양연화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4년 세번째 시즌, 김진영 감독이 다시 복귀했고 장명부도 건재했지만, 삼미의 성적은 다시 추락했다. 전후반기 삼미는 모두 6위로 꼴찌에 그쳤다.

전년도에 100경기 중 60경기에 나가서, 427.1이닝 5,886구를 던지며 혹사당했던 장명부가 부상으로 무너진 것이 치명타였다. 당시 삼미는 프로야구 역상 최다연패인 18연패의 불명예 기록까지 수립한다. 선수들도 지옥같은 트라우마가 왔을만큼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삼미는 1985년 4월 30일, 홈구장인 인천 도원 야구장에서 MBC청룡을 상대로 양승관의 3타점 3루타에 힘입어 기나간 18연패를 마감한다. 선수들은 그제서야 잃었던 웃음을 모처럼 되찾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삼미 선수들과 팬들에게 연패보다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모기업 삼미가 부실한 운영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청보식품으로 구단을 인수한다는 소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업간 매도가 확정된 순간은 삼미가 18연패를 끊던 바로 그날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
 

삼미는 시즌 도중에 구단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선수들과 팬들도 충격에 휩싸였다.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었던 것은, 감독도 선수단도 그대로 유지되고, 팀 이름만 '청보 핀토스'로 바뀌었다는 것.

1985년 6월 21일은 인천 홈구장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경기가 열린 날이었다. 안타깝게도 삼미는 최종전에서도 패배로 마감했다. 이날 경기를 끝으로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은 한국야구 역사에서 사라진다. 야구팬들은 아쉬움 속에 이제 다시 만날수없는 삼미의 이름을 떠나보내야 했다.

3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삼미 슈퍼스타즈는 최저 승률, 최다 연패, 특정팀 상대 전패 등 지금까지 회자되는 불명예 기록들을 더 많이 남겼다. 그러나 매 순간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투지를 불살랐던 약골 슈퍼맨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했던 팬들에게는 삼미 슈퍼스타즈와 함께 시간은 여전히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았다.

비록 이긴 날보다 진날이 더 많았지만, 그럼에도 삼미 슈퍼스타즈는 '뜨거웠고 슬펐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팀이었다. 삼미는 꼴등을 마지막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겼던 치열했던 도전의 과정은 우승팀 못지않은 국보급 스토리로 살아 남아 오늘날까지 야구팬들에게 웃음과 눈물, 감동을 남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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