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으로 돼지 피를 팔아야 했던 여자의 최후
[조영준 기자]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나쁜피> 스틸컷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가까운 미래의 대한민국에는 적혈구를 파괴시키는 신종 바이러스 'PT3'가 퍼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치료법은 젊은 피를 수혈받는 것이다. 문제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붕괴로 인해 국가가 소멸 위기에 놓인 상태라는 점. 수혈을 필요로 하는 고령층 환자는 1100만 명을 넘어서는 반면, 헌혈이 가능한 청년층 인구는 9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상황이다. 불균형한 수요와 공급 사이로 수혈이 가능한 청년층에서는 자연스럽게 불법매혈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피 한 팩에 300만 원. 이것도 그나마 싸게 파는 경우의 금액이다.
영화 <나쁜피>는 지금 우리 사회가 경험했고, 다가가고 있는 여러 문제와 걱정을 소재 위에 송현범 감독의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큰 주기로 반복되는 신종 바이러스의 위협과 인구소멸의 문제가 중심이 된다.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빈부격차 또한 이야기의 한 축이다. 불법매혈에 대한 단속을 정부에서 시작하지만 돈이 있는 사람들은 충분한 양의 피를 필요한 만큼 구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02.
"자네들은 그런다고 죽진 않잖아. 피야 다시 생기는 거니까."
극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주아(홍화연 분)다. 그녀는 철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서 피를 구하러 오는 이들과 흥정을 벌인다. 판매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매혈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집혈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한쪽 팔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주사자국과 멍이 가득하다. 이렇게까지 피를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갚아야 할 빚만 해도 몇 억이나 남아 있고, 상황이 좋아지면 어머니도 도시로 모셔와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그런 일들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나쁜피> 스틸컷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비슷한 맥락에서 다른 영업장 사람들로부터 얻어온 동업자 영태(이주찬 분)의 피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피를 구하기 위해 살인도 일어나는 시대다. 그가 받아온 피는 정확한 출처도 알 수 없고,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따뜻하다. 사람의 혈액이 아닌 돼지피다. 과거 정부에서도 돼지의 피를 변형시켜 수혈용으로 만들고자 시도했었고, 3차 임상까지 갔던 적이 있었다. 유일한 차이라면 사람의 피와는 달리 41도의 높은 온도를 가진다는 것. 하지만 영태는 정부의 임상 실험이 있었다는 이유로 사실상 사람의 피나 다름없다고 믿는다. 주아가 이런 정확한 내막을 알게 되는 건 이미 여러 팩의 혈액을 팔아버린 후다.
주아가 그리 모진 성격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상황을 어렵게 만든다. 이렇게 험한 일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돈이 모자란 사람들의 사정을 봐주곤 했다. 남자가 부정한 방법을 처음 제안했을 때도 다른 데 가서 또 팔면 된다고 거부했던 게 그녀다. 하지만 큰돈이 필요하고 현실과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급의 불균형은 주아를 양심의 딜레마 사이로 옮겨 놓는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돼지피를 사람의 것으로 속여 팔아야 하고, 인간적인 양심을 지키려면 지금 당장 주사기를 팔에 꽂으면서도 더 큰 수익을 포기해야만 한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나쁜피> 스틸컷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급한 대로 여기 있는 피들로 수혈했어요."
돼지피를 수혈받은 이들의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드러난다. 단속반이 두 사람의 매장을 찾기도 전이고, 매혈을 하고 번 돈으로 다른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이다. 돼지피를 사갔던 할아버지는 청년들의 피를 수혈받은 사람들의 몸이 펄펄 끓는 걸 봤다며 잔뜩 겁에 질려 환불을 요구한다. 철창 바깥의 세계로부터 알 수 없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외부의 제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부정한 행위의 대가가 발밑에 놓인다. 이미 매혈을 하는 행위 자체가 부정한 것이었으니, 구매자를 속이고 피를 바꿔치기한 일에 대한 책임은 이제 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의도의 문제와 달리 잘못된 방법과 뒤틀린 과정으로 인해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의 마지막 변명 속에는 언제나 '이렇게 될 줄 몰랐다'거나 '처음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들이 놓인다. 그들의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극 중 주아의 모습이 그러하듯, 마음의 결정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의 행동에는 제동 장치가 주어지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놓이는 그녀의 추락을 지켜보는 일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표정에서 드러나는 진심과 한 번의 잘못된 선택 이전까지 그녀가 보여줬던 선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서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게 될까?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마지막 물음이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국회 출석요구서 결국 길바닥에 버린 대통령실
- 빗물에 떠내려간 혈세 21억, 금산 파크골프장 미스터리
- 이진숙 "MBC 차기 사장, 투사가 와야...조선일보 잘하고 있다"
- "집게손" "꼴페미" 현대중노조, 글 삭제하고 입장문 낸다
- [사진으로 보는 일주일] 이런 날에도 꼭 새벽배송이 필요할까?
- 김영환 충북지사 앞 일회용컵, 민망해진 '국무총리 훈령'
- 신학림 "미공개 '김만배 녹취록' 있다... 윤석열 언급"
- 오마이TV 유튜브 시사토크 '최지은의 뉴스호로록' 7월 15일 첫 방송
- 김동연 "대북전단 단속이 위법? 어느 나라 통일부냐"
- 원고 없이 나선 바이든, 해리스에 "트럼프" 또 말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