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백화점에서는 동물이 '왕'입니다
[김성호 기자]
상상엔 경계가 없다고들 한다. 상상에 경계가 있다면 그건 상상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상상을 대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일 테다.
어렸을 적 초등학교 미술시간을 떠올린다. 매 수업 때마다 하나씩 그림을 완성해야 했던 그 시간들 가운데, 나는 자주 뻔한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딱히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나무 기둥을 갈색으로, 잎은 노란색으로, 하늘은 푸른색이고, 구름은 하얀색으로 그렸던 것이다. 태양은 붉고 머리는 검었는데, 따로 다른 색깔을 시도할 생각조차 얼마 하지 못하였다.
▲ 북극백화점의 안내원 포스터 |
ⓒ 팬엔터테인먼트 |
경계없는 상상,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멋진 그림을 그렸다. 녀석의 스케치북엔 색깔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규칙들이 없었다. 이를테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아래 한 면을 바닥으로 삼아 위를 공간으로 놓고 배치해야 하는 것인데, 녀석의 작품 가운데는 사면 모두가 바닥이고 중간에도 바닥이 될 만한 선들이 죽죽 자유로이 뻗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 또한 제멋대로였는데, 통상 정면의 평면모습을 그리게 마련인 보통의 아이들과 달리 위에서 바라본 인간이며 좌상단 사십오도 쯤에서 바라본 나무를 아무렇게나 그려 넣기도 하였다.
몇몇 아이들은 그를 두고 엉망이 아니냐고 놀려대기도 하였으나, 나는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다. 그건 정말이지 멋진 상상이었다고.
흔히 아이들에겐 어른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이 있다고들 여긴다. 그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상력 그 자체가 강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능력을 옭아매는 다른 무엇이 약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세상을 규율하는 온갖 질서들, 이를테면 물리학의 법칙이라거나 무엇들의 생김새라거나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에 대한 것을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 북극백화점의 안내원 스틸컷 |
ⓒ 팬엔터테인먼트 |
온갖 동물이 쇼핑하는 특별한 백화점
<북극백화점의 안내원>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법한 독특한 영화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동경해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입문한 이타즈 요시미의 70분 짜리 장편 애니로, 만화 <북극 백화점의 컨시어지 씨>를 원작으로 한다. 지난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국제경쟁작으로 초청해 상영된 작품을 미디어캐슬이 수입해 한국에 정식 개봉하게 되었다.
영화가 다루는 세계는 온갖 동물들이 인간화되어 어우러져 살아가는 독특한 공간이다. 특히 북극백화점이란 공간은 세상 모든 동물들이 찾아 자유롭게 쇼핑하는 명소 중 명소다. 독특한 건 인간은 손님이 아닌 백화점의 직원이란 것이다. 즉 동물들이 쇼핑을 하는 손님이고, 인간은 백화점의 직원들이 된다. 물론 사장은 다른 동물이다.
▲ 북극백화점의 안내원 스틸컷 |
ⓒ 팬엔터테인먼트 |
동물 손님들 만족시키는 인간 안내원의 수고
안내원의 역할이란 백화점 손님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다. 최대한 편의를 봐주어 불편하지 않게 하고, 그로써 백화점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안내원의 업이다. 서비스 직종, 특히 호텔 등에서 확고한 직역으로 구분되는 컨시어지가 일본에서는 백화점에서도 독자적 직군으로 제법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일본 특유의 친절하고 깍듯한 분위기가 백화점 고객들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안내원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최고급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프로의 자세가 읽히는 것이다.
동물이 손님이라는 낯선 설정이 도리어 아이들로 하여금 어른들의 세상을 이색적이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주인공 아키노가 만족시키려 애 쓰는 고객 중 흰족제비가 있다. 그는 제 거래처 사장인 올빼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고심을 거듭한다. 아내 올빼미를 끔찍이도 아끼는 남편 올빼미는 물건을 모두 계산하겠다는 흰족제비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한다. 접대를 하긴 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다는 흰족제비의 고백에 아키노는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 북극백화점의 안내원 스틸컷 |
ⓒ 팬엔터테인먼트 |
선명한 장단, 업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북극백화점의 안내원>은 그러나 분명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업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는 점이다. 아키노도 그렇고, 극중 흰족제비며 다른 누구들도 제 일에 정성을 쏟아 붓는다. 조금이라도 일을 더 잘 해내고자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월급이며 약간의 이익보다도 일 자체가 그들에게 중요하게 보여지는 순간이 여럿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다른 이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란 점이 꽤나 인상적이다. 누구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 그런 일에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일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한다. 그저 돈과 노동을 바꾸는 일을 넘어 사회와 주변과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의 가치를 생각하도록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선언 이후 일본 극장 애니메이션의 위기론을 말하는 이가 적잖다. 기둥이라 불릴 만한 이가 물러난 자리를 충실히 채울만한 인재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의 작가가 건재하다고는 하지만, 신예들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지난 반 세기 동안 전성기를 구가해온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우려하게 한다.
<북극백화점의 안내원>은 일본 애니가 처한 여러 문제를, 또 그럼에도 변치 않고 담아내려 하는 가치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는 것,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쳐낼 수 있도록 이끄는 것, 그것이 애니가 맡아야 할 본령임을 깨닫도록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과연 그 목적에 충분히 다가섰는가. 나는 감히 쉽게 답할 수가 없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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