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인류가 첫 풍요를 누린 20세기,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경제 성장률 유지 못해 비극으로 끝나
‘20세기 경제사’를 쓴 브래드퍼드 들롱 미국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교수가 정의하는 20세기는 1870년부터 2010년까지다. 100년 단위로 끊는 통상의 세기 구분법보다 긴 140년으로 설정하기에 이를 ‘장기 20세기’라 칭한다.
1870년 이전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인구 증가 속도보다 느렸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탓에 식량 부족에 시달릴 것이라고 경고한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1766~1834)의 저주가 유효한 시기였다. 당시 안락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것을 뺏어와야 했다.
1870년을 기점으로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이뤄지고 물질적 빈곤이 종식됐다. 풍요로움과 부가 급속히 증가한 놀라운 시기였다. 1870년 이전 세계 평균 성장률은 0.45%였는데 이후 2.1%로 높아졌다. 140년 뒤인 2010년 세계 경제 규모는 21.5배로 커졌다. 인구 증가를 감안한 2010년 세계 평균 1인당 소득은 1870년에 비해 8.8배로 늘었다.
하지만 들롱 교수는 이 놀라운 시기가 유토피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끔찍하게 종말을 고했다고 지적한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침체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2010년 장기 21세기가 끝났다. 들롱 교수의 장기 20세기는 물질적 풍요와 부의 급격한 상승에 따른 유토피아의 희망이 보인 시기였지만 결국 경제성장률 속도를 유지하지 못한 채 끝난 시기로 요약된다. 그리고 한때 높았던 성장률에 대한 기억은 시민들의 지속적인 분노와 체제 불안을 야기했다.
들롱 교수의 장기 20세기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1917~2012)이 정의한 ‘단기 20세기’와 대비된다. 홉스봄은 1914년의 1차 세계대전부터 소련이 몰락한 1991년을 단기 20세기라 정의했다. 홉스봄의 단기 20세기는 정치적 관점에서 시대를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홉스봄의 판단은 일본계 미국인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공산주의에 승리했으며 더 이상 큰 대립 없이 세계는 평화를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시기와 겹친다. 후쿠야마는 1989년 발표한 논문 ‘역사의 종말’에서 이 같이 주장했고 이 논문을 바탕으로 1992년 ‘역사의 종말과 마지막 인간’이라는 자신의 첫 책을 출간했다. 후쿠야마는 이미 당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인정한 상황이다.
들롱 교수는 홉스봄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들롱 교수는 홉스봄의 주장을 인용해 단기 20세기를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 파시즘, 현실사회주의의 3파전이 벌어진 시기로 진단한다. 이어 현실사회주의가 파시즘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결국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최종 승자가 된 것은 홉스봄에게 비극이었다고 설명한다. 홉스봄은 현실사회주의를 인류의 마지막 희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앞서 밝힌대로 20세기는 경제가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된 세기였기에 들롱 교수는 자본주의가 최종 승자가 된 것이 옳았다고 본다.
장기 20세기의 기점이 된 1870년은 유럽의 지형이 크게 바뀐 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1870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약 6개월간 이어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했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 황제가 폐위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시작됐다.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분열돼있던 독일 지역 국가들이 통일됐다. 이탈리아도 1870년 고대 로마 이후 처음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다. 대영제국이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 아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때였다.
들롱 교수는 장기 20세기 동안 두 차례 경제적 엘도라도 시기가 있었다고 분석한다. 1870~1914년과 1945~1973년이다.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전까지의 경제적 호황기를 미국에서는 도금시대, 유럽에서는 ‘벨 에포크(La Belle Epoque·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라 칭했다. 특히 미국에서 토머스 에디슨, 니콜라 테슬라 등의 발명가들이 활약하면서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벨 에포크와 도금시대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종지부를 찍는다. 이어 대공황(1929~1933), 제2차 세계대전(1929~1945)으로 오랜 기간 혼란이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70년대 중반까지 약 30년간 다시 장기 호황이 나타났다. 이 시기는 대공황의 고통을 겪은 인류가 사회민주주의를 실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1970년대 잇단 오일 쇼크로 장기 호황 시대가 끝났다. 동시에 사회민주주의 실험도 끝났다. 좀 더 평등한 가치를 지향한 사회민주주의에 경제성장률 둔화는 치명타가 됐다. 성장률이 높고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쉬울 때 드러나지 않았던 사회 복지 체제의 혜택을 받는 이들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들롱 교수는 사회민주주의가 쇠퇴한 뒤 신자유주의가 나타났지만 신자유주의는 선진국 엘리트들에게 했던 약속들을 많이 지켰을뿐 유토피아로의 진전을 전혀 이루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들롱 교수는 인류가 여전히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에서 웅크리고 있다며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진단한다. 다만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유토피아로 향하는 여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평한다.
20세기 경제사 | 브래드퍼드 들롱 지음 | 홍기빈 옮김 | 생각의힘 | 728쪽 | 3만78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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