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부서 주류로… 여성이 선별한 ‘한국 여성문학 100년’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민음사, 전 7권 3256쪽, 10만4000원
현재 한국 문학을 주도하는 작가들이 여성이라는 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각종 문학상 수상자들 속에서 남성 작가는 귀한 존재다. 하지만 그동안 남성 중심으로 서술된 한국문학사에서 여성은 줄곧 배제됐다. ‘여류작가’ ‘규수작가’라는 멸칭을 여성 작가 스스로 사용할 때도 있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다.
2012년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이 꾸려진 뒤 12년 만에 7권으로 완성된 선집은 근대 개화기 초기부터 1990년대 민주화 이후까지 100년간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여성의 시각에서 선별해 실었다. 국문학 연구자 김양선(한림대), 김은하(경희대), 이선옥(숙명여대), 영문학 연구자 이명호(경희대), 이희원(서울과학기술대), 시 연구자 이경수(중앙대) 교수가 참여했다. 선집은 시, 소설, 희곡 등 전통적인 문학장르 외에도 편지, 일기, 독자 투고, 선언문, 잡지 창간사 등이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모든 작품은 초간본 원문을 우선해 수록했다. 지금도 널리 읽히는 90년대 소설과 시를 포함해 쉽게 구할 수 없었던 50~70년대 작품까지 여성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김양선 교수는 지난 9일 기자간담회에서 “여성문학은 역사적 계보와 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으며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돼 왔다”며 “그동안 문학사에 없던 근현대 한국 여성문학의 계보를 집대성하고, 제도 문학 중심의 구분에서 벗어나 여성의 지식 생산과 글쓰기 실천을 아카이빙한 최초의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김은하 교수도 “오정희와 박완서가 등장한 7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서 여성문학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됐다”면서 “오랜 시간 의심받아온 여성작가의 ‘저자성’과 여성문학의 ‘문학성’,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되고 주변화됐던 여성문학을 온전히 복원하는 작업”이라고 덧붙였다.
기존의 문학사에서는 나혜석의 ‘경희’가 여성교양지 ‘여자계’(女子界)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봐왔다. 하지만 이번 선집에서는 그보다 20년 앞선 1898년 발표된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施通文)을 ‘여성 글쓰기’의 출발로 삼았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권리가 있다면서 학교 설립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이 글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결혼한 여자를 뜻하는 ‘소사’를 붙인 이 소사와 김 소사가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 발표했다. 선집은 “근대 매체인 신문을 통해 공적 담론인 선언문의 형식으로 페미니스트 집합 의식을 발표한 최초의 글”이라고 설명했다.
선집을 만드는 데 연구자들이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작가와 작품의 선별 작업이다. 소설가 박화성의 경우 그동안 대표작으로 꼽혔던 ‘하수도공사’ 대신 여성 노동자인 주인공을 내세워 성적 차별을 겪는 현실을 다룬 ‘추석 전야’를 대표작으로 선정, 수록했다. 이름없던 작가가 재발견되기도 했다. 해방 전후 시대를 다룬 김은하 교수는 “기존 문학사에서는 거의 다뤄진 적이 없던 월남 작가 박순녀와 이정호에 주목했다”며 “박순녀는 이방인, 난민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그려낸 게 남달랐고, 이정호 작가는 사상을 넘어 한국 전쟁 때의 성폭력, 남성적 야만주의에 대해 다루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고 전했다. 기존의 문학사나 여성문학 연구에서 쉽게 보기 힘들었던 이름도 등장한다. 1980년대 편에 나오는 최명자, 정명자 시인이 대표적이다. 최명자는 버스 안내원으로 일했던 경험 등 여성 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을 진솔한 언어로 썼고, 정명자는 ‘동일방직 노조 똥물 투척 사건’을 다룬 시를 발표했다.
문학사에서 주변부로 배제돼 왔던 여성문학은 1990년대 한국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한다. 이명호 교수는 “1990년대에 등장한 많은 여성 작가들은 단순히 수적으로 증가했을 뿐 아니라 이 시대 문학의 핵심을 견인했다”면서 “영미권에서는 1970년대에 여성문학이 소수자 위치에서 벗어났다는 선언이 있었다면 한국에서는 이 시기가 1990년대였다”고 말했다. 연구모임은 앞으로 7권의 선집을 1~2권으로 압축하는 작업과 함께 여성 문학사도 공동 집필도 고려 중이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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