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 꼭 보존해야하는 이유

완도신문 2024. 7. 1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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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완도의 가치 드높여"... 전국에서 가장 항일의지 높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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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 정지승]

제2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 미국은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 한 개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시에,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나머지 한 개를 떨어뜨렸죠.

원자폭탄을 떨어트리기 전까지 6개월간 미국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67개의 도시를 공습했습니다. 영국, 대만과 함께 미국은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강요했으나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45년 8월 6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히로시마에, 8월 9일 '팻 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됐습니다.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된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군 제2사령부이면서 통신센터이자 병참기지였습니다. 일본의 군사상 매우 중요한 근거지였죠.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지 6일이 지난 8월 15일 일본은 마침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9월 2일 항복 문서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던 것이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조선인들 이용한 일본인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합니다. 우리에게는 기쁨의 날이었지만, 우리나라 곳곳에서 상권을 형성하고 터전을 삼았던 일본인들은 불안했죠. 소식통이 늦었던 우리 지역에서 그들은 어찌할 바 몰라 했을 것입니다. 항구를 끼고 있는 도시에 살았던 일본인들은 그나마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쉽게 했지만 이곳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소식통이 어두웠던 그들은 그동안 알고 지냈던 조선인들을 섭외했습니다. 언제라도 다시 돌아 올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평소 알고 지낸 조선인에게 그들의 재산을 맡기기로 합의를 본 것이죠. 그 재산을 맡은 조선인들은 그들을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키고 뱃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그들과 연락체계를 꾸준히 형성합니다. 그들의 후손들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도 모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결의친목회'랍니다.

그들 중 일본인 회사와 큰 재산을 담당한 이들은 친일파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재력을 빌려 정치권에 가입합니다. 재산을 유지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죠. 아직도 일본과의 친화적 사고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한번쯤 의심해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전국에 친일을 하지 않은 조선인은 많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되찾을 희망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지역은 다릅니다. 어느 지역보다도 항일의지가 강한 곳이 완도였습니다. 고금도, 약산도, 신지도, 소안도 우리지역 곳곳에는 항일투쟁의 흔적이 많습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 흔적이 남은 곳들
 
 청산도 도청항 골목 파시거리 적산가옥
ⓒ 완도신문
그래서 완도군에 있는 적산가옥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지역에서 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두운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도심 골목과 군청 인근에 적산가옥이 더러 눈에 보입니다. 청산도 도청항 파시 골목에도 그 흔적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가옥의 내부가 일부 변형됐더라도 그 형태는 아직 남아 있으니, 보존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게 주민들의 생각입니다. 일본인 상인들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일부 재산은 버리고 가거나 누군가에게 의탁했을 것입니다. 

그 흔적들을 보존해야만 일제에 항거하며 항일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완도의 항일정신을 후대에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흔적들은 우리의 아픈 역사입니다. 

사수도 해역에서 터전을 삼았던 소안면 당사리 주민들과 청산면 주민들은 일제의 수탈에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당사도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해남의 천 모씨의 소유가 됐습니다. 완도군이 등록한 장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사도는 지역 주민들이 십시일반 나무를 베어 판매한 돈을 7년 동안 갚으면서 섬을 되찾았지만, 장수도는 달랐습니다. 당사리 주민들은 수시로 다녔던 장수도를 개인이 소유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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