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 해외여행, 비슷하게 이걸 까먹었네요

권유정 2024. 7. 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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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번 기억' 넘어 환전으로... 약자 위한 고민은 모두를 위한 좋은 결과로 돌아온다

경증의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대안학교의 특수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발달장애 학생들이 자립과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여행, 캠핑, 농사, 라이딩, 메타버스, 연극 등 다양한 활동 및 수업을 합니다. 자립과 취업을 위해 노력하는 발달장애인들을 보며 장애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글을 씁니다. <기자말>

[권유정 기자]

해외 자유여행에서 골치 아픈 고민거리 중 하나는 환전이다.

우리는 패키지처럼 단체식사를 하고 일괄 비용을 결제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 모두가 각자 자신의 4박 5일 치 식비와 간식비, 교통비 등을 20~30만 원 이상 소지해야 했다. 소수의 교사가 모든 아이들을 매 순간 관리감독 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돈의 보관부터 사용까지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여행으로, 최대한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지만 교육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건 아니다.

성인이 된 발달장애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을 교육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다. 모든 것을 다 가르치기에는 아이들의 한계도 있고, 시간의 한계도 있다.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더 나은 능력을 갖추게 될지도 모르지만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 학교의 교육은 부족한 학습을 보완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능력을 활용하여 삶을 헤쳐나가는 방법을 배우는 데에 중점을 둔다.

때때로 여행은 인생과 같다. 우리는 낯선 여행지를 탐험하기 위해 관광지 검색부터 경로, 예산, 먹거리, 쇼핑, 환전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나 완벽할 순 없고, 모자람이 있어도 떠나야 한다.

환율의 개념을 이해하고 계산하고 홍콩달러까지 셀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걸 다 가르치려면 우리는 여행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돈도 잘 세지 못하는 아이들과 홍콩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카드를 발급하기로 했다.    

무분별한 소비를 막아줄 현명한 방법

카드는 일단 현금을 소지하는 부담을 덜어주고, 화폐를 세거나 계산하지 못해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사용내역을 확인하기 편하다는 것도.

우려가 되는 점은 무분별한 소비였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과는 화폐단위가 달라 액수를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현금처럼 잔액과 사용금액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니 예산보다 과하게 사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4박 5일을 지내야 하는 예산인데, 중도에 부족해지면 몹시 곤란했다.

그때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준 건 기술의 발전이었다. '외화 충전식 선불카드'. 말 그대로 외화를 충전하여 결제하는 카드로, 충전을 하여 사용한다. 그렇다보니 무분별하게 결제할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큰 비용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부담감도 없다. 현금이 필요하면 ATM에서 소액씩 출금할 수도 있고, 부족하면 바로 충전이 가능하고, 남으면 다시 원화로 바꿀 수 있다.

최근에는 해외여행의 필수품이라 할 정도로 보편화되었고, 여러 회사에서 다양한 카드를 앞다투어 출시하고 있다.
 
 2023년 오사카 졸업여행에서. 트래블월렛 카드로 ATM 수수료 없이 현금을 출금할 수 있다.
ⓒ @호산나대학 유튜브
 
개인적으로는 트래블월렛과 트래블로그, 신한 SOL트래블 체크카드까지 여러 개의 여행용 카드를 갖고 있지만 학생들과 만들기로 한 건 '트래블월렛'이다(후원을 받기 이전에는 PPL이 아니라고 당당히 썼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후원을 받기 전인 지난해 오사카 여행에서도 트래블월렛 카드를 사용했으니 선택의 이유는 홍보를 위한 과장이 아니라 순수한 진심이다. 정말.

우리가 트래블월렛을 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발급과 사용이 다른 카드보다 훨씬 쉬워서였다.  

트래블로그는 하나은행(최근 다른 은행 계좌로도 가능하도록 개선되었다), 신한 SOL트래블은 신한은행 트래블 외화예금 계좌가 있어야 하지만 트래블월렛은 아무 은행이나 입출금 확인이 가능한 계좌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만들기에 용이했다. 그리고 지난해 사용해 보니 어플도 직관적이고 사용방법이 간단해서 아이들이 쓰기가 좋았다.

기술은 발전만큼이나 접근성도 중요하다. 발달장애 학생들과 함께 하며 나는 혼자서는 느끼지 못했던 어려움을 자주 맞닥뜨린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어도 사용이 어려우면 무용지물이다.

나에게는 약간의 불편함과 번거로움 정도인 차이가 누군가에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니고, 누군가에겐 엄청난 그 차이가 우리가 트래블월렛을 선택한 이유였다.

다른 카드들은 대부분 기존 은행어플에 통합된 기능이라 메뉴도 많고 사용방법이 복잡한 반면 트래블월렛 어플은 쉽게 충전과 내역확인이 가능했다. 메인화면에 크게 보이는 '충전하기' 메뉴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카드 on/off 등 간단한 조작만으로 주요 기능을 활용할 수 있어 발달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사용방법이 너무 쉬운 나머지 지난해 오사카 졸업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한 학생이 혼자서 틈틈이 환전을 하는 바람에 부모님이 카드가 복제되어 돈이 결제된 걸로 오해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카드에 연결된 원화계좌에 계속 출금내역이 찍히니 결제가 된 걸로 오해한 것이다.

다행히 빠져나간 돈은 엔화로 환전되어 트래블월렛 계좌에 고스란히 충전되어 있었고, 다시 원화로 환불해 큰 문제없이 해결하였다. 그만큼 우리 학생들도 몇 번 연습하면 혼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트래블월렛은 사용방법이 쉽기 때문에 올해도 트래블월렛 카드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최근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했을 때 유용했던, 새로 생긴 친구 간 송금, N빵결제(나눠서 결제) 등의 기능이 우리의 졸업여행에도 적절히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카드 준비는 됐는데, 난관은 역시
 
 2023년 오사카 졸업여행에서, 카드 덕분에 여행이 한결 수월했다.
ⓒ @호산나대학 유튜브
 
그래서 올해는 졸업여행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카드발급을 준비했다.

홍콩으로 여행지가 결정되자마자 카드를 발급받을 거라고 알리고, 수업 중 학생들이 직접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사항을 안내했다. 필요한 준비물은 본인 명의의 스마트폰과 입출금 확인이 가능한 개인 인터넷뱅킹, 주민등록증.

지난해에는 준비기간이 촉박해 이미 준비가 되어있는 학생들만 학교에서 지도하고 나머지는 가정에서 부모님과 발급하도록 했었다. 올해는 미리 동의를 받고 필요한 준비를 해오도록 했다.

인터넷뱅킹 사용으로 인한 문제가 우려되는 학생들에게는 카카오뱅크 한도계좌를 개설하도록 안내했다. 여행에 필요한 금액만 입금하여 사용할 계획이었다.

어차피 현대사회는 인터넷 등 온라인으로 금융거래를 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이다. 염려되는 부작용 때문에 무조건 차단하기보다는,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사전준비에 적지 않은 시간이 들어갔지만 미리 준비를 한 덕분에 카드발급은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영문 이름도, 주민등록번호도, 곳곳에 함정이 산재해 있었으나 여권정보와 입국신고서를 공부하며 개인정보를 쓰는 연습을 여러 차례 해서인지 약간의 도움만으로 모두 카드를 신청할 수 있었다.

난관은 이번에도 역시나 비밀번호였다. 어플 비밀번호 6자리와 카드 비밀번호 4자리. 비밀번호 중에서는 가장 난이도가 낮은 숫자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비밀번호였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험난한 산이라는 걸 지난해 사투를 겪으며 절절히 깨달은 바 있다.

그래서 올해는 비밀번호를 설정하는 과정부터 단단히 당부했다. 잊기 전에 곧바로, 반드시 휴대폰에 비밀번호를 '메모'해 놓으라고. 몇몇 아이들은 자기가 기억할 수 있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믿지 않았다. 이건 신뢰의 영역이 아니다.

"저는 지문으로 해놔서 괜찮아요!"
"그래도 카드등록하고 ATM 출금할 때 비밀번호가 필요하니 메모해 놔."
"에이, 교수님. 엄마 생일인데 설마 제가 까먹겠어요?"

까먹었다. 녀석은 호언장담한대로 어머니의 생신을 잊어버리진 않았으나, 비밀번호를 그걸로 설정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신청한 카드를 수령하고, 등록을 하려고 하자 그 아이 외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 맙소사. 26명의 아이들이 너도나도 비밀번호를 모르겠다고 손을 드는 건 정말이지...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광경이었다.

그래도 작년의 교훈(?)으로, 미리 메모를 해놓은 덕분에 비밀번호를 찾아서 무사히 카드를 등록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한 아이는 메모한 정보도 찾아낼 수가 없어서 비밀번호를 결국 재설정해야 했다. 지난해에 사용할 때는 카드 등록 전에 비밀번호를 모르면 고객센터에 연락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올해 사용해 보니 과정이 바뀌어 어플에서 간단하게 비밀번호를 재설정할 수 있었다.  
 
 카드발급 최후의 관문, 비밀번호
ⓒ 권유정
 
한 학기 동안 차곡차곡 저축한 돈을 트래블월렛과 연결된 개인계좌에 입금했다. 꼬박꼬박 모아서 현지에서 사용할 비용을 다 준비한 아이도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다.

목표금액을 다 채우지 못한 아이들은 방학 동안 나머지를 저축하여 비용을 채우도록 안내했다. 9월에 여행을 가게 되어 준비기간이 넉넉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아쉬운 점은 중간에 방학이라는 공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찌하랴.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입금된 금액으로 환전을 하는 연습도 했다. 트래블월렛 어플에서 홍콩 달러를 충전하면 간편하게 환전을 할 수 있다. 현금으로 환전하는 것보다 수수료도 적고, 절차도 단순하니 얼마나 편리한가.

예전처럼 은행이나 환전소에서 현금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면 발달장애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해외 자유여행은 감히 꿈도 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 뿐 아니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보가 없어서, 어려워서 등의 이유로 더 나은 기술을 누리지 못하고 불편함과 불이익을 감수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기술의 발전이 소수만 이용할 수 있는 '꿀팁'이 아닌 다수를 위한 편리가 되려면 보다 세심한 고민이 필요하다.   

장애인, 고령층 등 약자를 위한 고민은, 단순한 그들만을 위한 복지나 시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해외 자유여행 도전기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작은 소망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brunch.co.kr/@h-teacher)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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