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협회 기술철학 때문에 홍명보 선임? 전술 성향은 기술철학과 오히려 '상극'인데
[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홍명보 신임 국가대표팀 감독을 선임한 대한축구협회 측 책임자 이임생 기술발전이사도, 이를 수락한 홍 감독도 축구협회 기술철학(MIK)을 이유로 꼽고 있다.
그런데 홍 감독은 사령탑으로서 여러 장점이 있지만, 최근 축구협회가 발표한 기술철학과는 딱히 어울리는 특성이 없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오히려 안 어울리는 편에 가깝다.
홍 감독은 K리그에서 분명 역량을 보여준 감독이다. K리그1 연봉 2위팀을 1위에 올려놓는 게 그리 어려운 일 아니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지만 울산은 현재의 화려한 선수단을 갖춘 뒤에도 유독 정규리그 우승을 어려워했던 팀이다. 2위 징크스를 깨고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한 건 확실한 성과다. 그래서 K리그 1위 감독이니까 데려간다고 하면 차라리 논리적이지만, 홍 감독의 전술 성향이 축구협회 기술철학에 잘 맞는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축구협회는 지난달 말 기술철학을 발표하면서 큰 틀에서 세 가지 정신으로 '빠르고, 용맹하게, 주도하는'을 꼽았다. 이들 중 '주도하는'이 전술적인 용어로 보이기도 하지만, 영어 설명을 보면 그렇지 않다. 경기양상을 주도한다는 의미나 능동적이라는 의미로 축구전술에서 쓰이는 프로액티브(proactive)가 아니라 'focused'다. 이는 목표에 잘 집중한다는 의미다. '주도하는'의 의미에 대한 세부 설명에도 '사전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핵심적이다. 이는 특정한 전술 방향성을 의미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특정 경기에서 수비적으로 웅크리겠다는 전략을 세웠다면, 이 전략에 잘 'focused' 된 선수들이 이행해냈을 때 이를 주도한 경기로 보겠다는 뜻이다.
결국 기술철학에서 전술적인 방향성을 나타내는 부분은 '빠르고'에 주로 포함돼 있다. '실천하는 행동력, 생각의 민첩성, 변화에 대한 반응, 회복에 대한 탄력성' 등이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정신력이 강한 선수의 덕목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특히 생각을 민첩하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은 현대 팀스포츠에서 핵심 덕목으로 꼽힌다. 영어로 디시전메이킹 프로세스(decision-making process)인데, 한국어에는 정확하게 일치하는 용어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 김판곤 전 축구협회 부회장을 비롯한 축구인들도 그냥 영어로 자주 표현하곤 했다.
이미 20여 년 전에 벨기에가 적극적인 유소년 정책을 실행하고, 그 성과로 황금세대를 배출했을 때도 유소년 선수의 핵심 덕목 중 하나로 꼽았던 게 이 디시전메이킹 프로세스였다. 경기장의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선수가 가장 각광받는 시대다. 세계적인 유망주를 봐도 요즘 가장 떠오르는 유망주들은 과거 슈퍼스타들에 비하면 축구 기계같다는 평가를 듣는데, 창의성보다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판단이 장점인 선수가 대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주드 벨링엄, 독일의 플로리안 비르츠 등이 그런 디시전메이킹을 장점으로 삼는 대표적 선수들이다.
그런데 홍 감독의 축구 성향은 더 빠르고 정확한 디시전메이킹 능력을 갖춘 선수를 육성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팀 전술에 맞춘 플레이를 요구하고 튀는 선수를 경계하는 홍 감독의 경향은 디시전메이킹이 좋은 선수를 육성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보이기도 한다. 유소년 단계에서 선수의 자율적인 플레이를 허락해야만 이 능력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유소년 단계부터 경기 중 선수에게 지시를 최소화해야 하고, 선수가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게 해야만 복잡한 축구장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힘이 생긴다. 벨기에의 경우 자주 공을 잡고 다음 플레이를 판단할 수 있도록 3-3-1-3이나 4-3-3 등 여기에 맞는 포메이션을 전국 유소년팀에 적극 권장, 지금과 같은 전반적인 기량 향상을 이끌어냈다. 일단 A대표팀 감독은 이런 선수 육성과 무관한 자리일뿐 아니라 홍 감독은 그런 축구의 모범을 보이는 전술성향의 소유자도 아니다.
이는 기술철학 발표 때 한국의 숙제로 지적된 "특징 있는 선수들이 없다"는 점과도 이어진다. 홍 감독의 축구는 특징 있는 선수를 육성하는 데 딱히 어울리지 않는다. 팀 플레이를 강조하는 쪽이다.
또한 축구협회는 기술철학 발표 당시 2022 카타르 월드컵 모든 참가국 중 한국의 볼 프로그레션이 최하위였음을 개선할 점으로 꼽았다. 이 기술이사도 홍 감독 선임의 이유를 길게 이야기할 때 볼 프로그레션이라는 용어를 썼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이 용어를 '공을 상대 선수를 지나쳐 공간이나 상대 선수 뒤로 운반함으로써 상대팀 대형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지닌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즉 상대 대형의 틈을 공략하는 패스나 돌파를 말한다.
이 점에서도 홍 감독은 딱히 강점을 보이지 않는다. 상대 대형이 다 갖춰져 있을 경우, 그 틈을 강제로 벌리고 공격하기 위해 라인 사이로 공이나 선수를 투입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신 측면으로 공을 보내 삼각형을 만들고 순환시키면서 상대가 딸려 나오는 효과를 기대하며, 혹은 크로스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앞서거나 동점인 상황에서 점유율을 유지하면서 상대의 전진을 이끌어내고, 그 다음 속공 기회를 노리는 선택도 선호한다.
홍 감독이 축구협회 전무로서 좋은 행정 역량을 보인 적 있는 만큼, 기술철학을 국내 축구 각 단계에 적용하면서 전반적인 축구발전을 이끌어내겠다는 책임감을 갖는 건 자연스럽고 또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이 점 역시 A대표팀 사령탑이 아니라 차라리 축구협회 전무 등 고위행정직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더 어울리는 역할로 볼 수 있다. 이는 감독직 수락이 발표되기 전까지 축구팬들 사이에서 '차라리 협회 회장직을 한 번 하실 것 같다'는 농담이 희망 섞어 들렸던 이유이기도 했다.
사진= 풋볼리스트,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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