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잠들어 있던 고려 최초 화물선, 완도선을 아시나요?

완도신문 유영인 2024. 7. 1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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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40주년... '고려난파선, 해남청자를 품다' 상설전시 10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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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 유영인]

ⓒ 완도신문
 
ⓒ 완도신문
올해는 완도선 발굴 4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우리나라의 수중 고고학은 지난 1976년 신안의 증도해역에서 일본의 하카타(博多)로 향하던 원(元)나라 무역선의 도자기가 고기를 잡던 어부에 의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신안선 발굴을 시작으로 완도선, 목포 달리도선, 군산 야미도선, 태안선 등 10여 척 이상의 고대선박이 각종 유물과 함께 발굴되어 우리나라 해상활동의 역사를 알게 하는 중요한 단서들이 되었다.       

특히 완도는 해상왕장보고대사가 활발한 해상 활동으로 동북아해상 교역로를 장악하였으며 이후 고려시대때까지 활발한 해상활동이 전개되었으나 조선의 개국과 함께 바다가 막히는 해금정책으로 연안해역을 운항하는 배들만이 근해를 운항하며 물자를 운송하고 더 이상의 국제적인 교역은 중단되었다.

지난 1983년 12월은 우리나라 수중 고고학의 또 다른 한 획을 긋는 매장문화재가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고려시대 화물선이 한 잠수부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완도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려시대선박으로 키조개를 전문으로 채취하는 잠수부 김용렬(金勇烈 42. 당시 여수시 국동 거주)씨 등이 약산면의 동쪽 끝 섬 어두지해역에서 키조개를 채취하던 중 청자 4점을 인양하여 매장문화재로 순천지청에 신고하면서부터이다. 

섬어두지 해역은 조약도(助藥島, 약산면)의 동쪽 끝에 있는 어두리 뒷마을 앞 300m 해상의 무인도로 유속이 매우 빠른 곳인데 완도선은 이곳을 항해하던 중 악천후를 만나 북쪽의 돌출된 암초에 부딪쳐 좌초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신고를 받은 순천지청은 김인식(金仁植, 당시 담당검사) 검사의 확인작업으로 완도군과 고흥군의 관계자 입회하에 현장확인 조사를 실시하여 청자류가 다량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문화공보부(현 문화관광부)에 보고하고, 곧바로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이 '완도 어두리 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을 구성해 발굴에 착수하여 1000여 년 세월을 바닷속에 수장되었던 유물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발굴은 2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1차는 기초조사로 1983년 12월 해당구역에 대한 해저면 상태와 유물매장량확인 및 발굴의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조사하여 해저유물이 다량으로 산포되어 있는 50∼60m의 융기된 구릉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대략 반경 10m의 원형안에 갯벌에 묻힌 선박과 함께 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2차 발굴은 이듬해 봄인 1984년 3월부터 5월까지 본격적으로 해저에 매장된 도자기를 비롯한 침몰선체와 기타 유물을 완벽하게 인양하였다.  

유물인양은 잠수부가 지정된 구간에서 유물을 찾아 광주리에 담으면, 조사선에서 광주리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인양된 유물은 갯뻘에 묻혀 원형이 보전된 저판부(底板部) 용골(龍骨)을 비롯한 선체의 일부가 남은 고려시대의 목선(木船. 완도선) 1척과 선원들이 사용했던 약간의 금속제품, 함지박 등 목제품, 도자기는 전체적으로 파손이 안 된 상태로 배에 실릴 때 그 자체를 유지한 녹청자 3만645 점이 인양되었다. 또한 흑갈유 도기 26점과 회흑색구토기대호(灰黑色口土器大壺) 1점, 토제시루 1점이 파손된 채로 인양되었다.

청자는 철회매병(鐵繪梅甁)과 청자철화모란넝쿨무늬장고(靑磁鐵花牡丹唐草文長鼓)를 제외하면 대접·접시·완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광구병(廣口甁)·유병(油甁)·호(壺)·발(鉢)·잔(盞) 등이 일부분을 이루었다.

인양된 도자기들은 오늘날의 해남군 산이면 진산·초송리 일대의 요지군에서 제작된 것으로 파악됐다. 제작시기는 고려 도자사에서 새로운 전환기인 11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완도선 도자기의 특징은 청자대접·접시 등의 생활용 도자기들로 매우 서민적이라는 것이다. 강진과 부안에서 생산된 청자가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이나 관청용인데 반해, 완도선 출토 도자기들은 제주도를 포함하는 전라남도와 경상도의 지방관청 및 토호, 사찰 등에 수요를 충당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진산·초송리 일대의 자기소민(磁器所民)들이 만든 도자기를 실은 선박이 전라남도와 경상도, 남해안과 제주 등지에 생활용 도자기를 공급하기 위해 남해안을 항해하다가 이곳에서 좌초해 침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철화모란문 광구병(위)
ⓒ 완도신문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도자기들은 상감청자가 만들어지기 전 11세기 후반 우리나라 도자사의 전환기에 만들어지고 생산지가 확실한 국내제품이라는 점과 3만 점이 넘는 막대한 생활도자기라는 점, 청자·흑갈유도기·토기 등 다양한 도자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 대접·접시로 대표되는 당시의 생활용 도자기였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도자사에 있어서 매우 주목받고 있다.

완도선의 발굴 성과는 그동안 고려시대에 사용되었던 선박의 기록이나 자료가 부족하여 우리나라 고선박의 역사와 그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완도선의 발굴로 고선박에 대해 매우 중요한 학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인양된 막대한 양의 도자기들은 11세기 후반 제작된 녹청자의 양상과 제반적인 특징, 수요와 공급과정, 용도와 수요층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도움을 주는 자료로 우리나라 도자사 연구에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완도 어두지 섬 해역에서 발굴된 완도선과 도자기들이 문화유산청 '국립목포해양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10월 13일까지 ″고려난파선, 해남청자를 품다″로 상설 전시되고 있다. 전시장을 방문하는 일반인들의 관심도 매우 높다, 다행인 것은  '국립목포해양문화재연구소'가 완도선과 발굴 유물에 대한 국제세미나를 가을철에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최근에 접하고 있다. 
 
 청자철화목단넝쿨무늬 장고(중간/국내 하나뿐인 녹청자)
ⓒ 완도신문
인근 해남군은 녹청자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산이반도의 청자요지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또한 해남군 황산면에서 3대째 녹청자를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는 화원요(華院窯. 명장 정기봉)에 녹청자의 재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좋은 보배라도 형식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는 국가에 귀속되어 있지만 완도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려시대의 배와 3만점이 넘는 녹청자의 소유권을 보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 들어 지방자치단체나 국가적으로 문화재의 재 자리 찾기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완도군도 이와 발맞추어 관련부서에서는 '국립목포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장을 찾아 돌아보고 부서 간 협업으로 완도선 발굴 40주년 국제세미나를 차분히 준비하였으면 한다. 또한 앞으로 문화재 찾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면 적극 참여하여 가까운 미래에 문을 열개 될 완도해양박물관 앞바다에 완도선이 복원되어 두둥실 띄어지고, 박물관내에는 완도선 특별관이 만들어져 완도선의 유물이 영구 전시되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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