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불취업 넘어 용암취업"…합격자 80~90%가 대기 중
" “작년엔 ‘불취업’, 올해는 ‘용암취업’ 넘어 ‘무(無)취업’ 상태예요.” "
대구의 한 간호대학에 재학 중인 4학년 김정은씨(22)는 올 상반기 대학병원 중 단 한 곳에도 지원서를 넣지 못했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두고 정부·의료계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대형 병원들이 신규 간호사 채용문을 굳게 닫았기 때문이다. 경상권 지역 병원 취업을 희망하는 김씨는 내년 졸업을 미루고 휴학할지 고민하고 있다. 김씨는 “비교적 취업률이 높다는 간호학과에 진학했으나, 지난해 합격한 선배들의 입사도 무기한 연기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리가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고 토로했다.
의정 갈등의 여파가 간호대 졸업반 학생들의 취업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11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22곳 가운데 간호사를 채용한 곳은 중앙대병원 단 1곳에 그쳤다. 전국으로 범위를 확대해도 강원도 내 병원 1곳이 추가될 뿐이다. 대한간호대학학생협회가 지난달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간호대 학생의 약 80%는 취업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40%는 졸업 유예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반기 채용 계획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 내 이른바 ‘빅5’(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 병원 가운데 올해 안에 내년도 신입 간호사 채용 계획을 확정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전국에서 하반기 신규 채용을 공식 예고한 곳은 원광대병원뿐이다. 빅5 중 한 병원 관계자는 “지난해 채용된 간호사들의 발령도 원활하지 않다”며 “병원이 정상화돼야 채용도 예년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빅5 병원들은 통상 매년 4~5월쯤 채용 공고를 띄우고, 세 자리 수 규모로 신규 간호사를 채용해 왔다. 이 병원들은 전공의 이탈로 하루 최대 10억원 가량의 적자를 내는 것으로 알려지며 줄줄이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 상태다. 대한간호협회 관계자는 “4~5월쯤 수도권 병원 인사팀 직원들과 만나 논의했으나, ‘10월쯤엔 동시 채용에 나서야 하지 않겠나’ 라는 말만 오갔을 뿐 뾰족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병원들이 올해 신규 채용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건, 지난해 국가고시에 합격한 신규 간호사의 입사·발령마저 밀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지난해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22곳에서 신규 채용한 간호사 가운데 입사·발령 대기 상태인 간호사가 전체의 80~90%에 이른다”고 밝혔다.
통상 상급종합병원은 직전 해에 뽑은 간호 인력을 이듬해에 월별로 순차 발령을 내기 때문에, 매년 7월쯤엔 전년도 채용 인원의 절반 정도가 발령 상태여야 한다. 지난 2월 졸업한 김모(24)씨는 “원하던 대형병원에 합격한 기쁨도 잠시, 5개월째 경력 공백을 겪고 있다”며 “발령 일정을 미리 알려주면 좋은데 대뜸 ‘1~2주 뒤 출근하라’고 고지하는 식이라 말 그대로 붕 뜬 상태”라고 말했다.
대학병원 입사를 기다리다 지친 일부 예비 간호사들은 2차 병원·한방 병원 등으로 눈을 돌려 경력을 쌓기도 한다. 간호대 학생과 간호사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무기한 웨이팅에 지쳐 지역 병원에서 일한다”, “괜히 작은 병원에서 잘못 배웠다가 대학병원 가서 적응하기 힘들면 어쩌나”, “입사가 밀리다가 혹시나 채용 취소 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같은 고민 상담글이 올라왔다. 주영희 충북보건과학대 간호학과 교수는 “대학병원은 상위 성적 학생들이 가는데, 채용이 아예 안 돼 어쩔 수 없이 하향 지원하는 경향이 있다”며 “4년동안 열심히 준비하고도 경력을 쌓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서원 기자 kim.seo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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