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지금 왜 탈진영 정치가 절실한가?
공동체의 전체 문제를 다루는 정치는 필시 갈등의 해소를 목표로 한다. 갈등 해소에는 과정과 결과의 미결정성과 불확정성이 필수다. 과정과 결과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대화를 통한 이견조정과 타협, 그리고 그에 기반한 공동체의 안정과 평안을 본령으로 하는 정치의 궁극적 존재 이유는 실종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정치는 공적 가치와 목표를 망각한 채 한편으로는 전체 진영대결 구도로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개별 이슈마다 충돌하는 두 방향의 극단화로 인해 갈등해소의 경로에서 현저히 벗어나 있다. 그리하여 이슈는 이슈대로 사사건건 대치하고, 진영 구도는 구도대로 요지부동이다. 진영논리는 개별 이슈마다 속속들이 침투하고, 핵심 공공의제는 진영 구도에 갇혀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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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나라가 진영대결 수렁에
진영의제 과잉집중 악순환
공통의제 방치와 실종은 최악
나라와 국민 살릴 정치 절실
」
집단 갈등에 관한 많은 실험과 연구들이 밝혀내었듯 확신적·확정적 갈등은 서로 대치만 격화되고 감정만 악화된다. 각 개인과 진영이 정서적 자위와 진영적 안주에 만족하는, 그럼으로써 실제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는 이른바 지정석 갈등이나 안락의자 갈등을 말한다.
이슈 매몰 정치와 진영대결의 확정적 착종과 갈등의 결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장 무서운 현상은 탈진영적 공공의제의 실종이다. 아니다. 소극적 실종을 넘어 공공의제는 공통의 갈등 의제로 채택되지도 않는 적극적 방치에 가깝다. 모든 공적 갈등 의제는 실질적 해법의 모색에 앞서 공동체의 공통 의제로 채택되느냐 여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할 때 인류의 탁월한 선현들은 오랜 고뇌와 논의를 통해 일련의 공적 의제들, 즉 상이한 의견과 세력 사이에 공동체의 ‘공통’ 범주들을 찾아내고 합의하기에 분투하였다. 이때 ‘공통’이라는 개념 속에는 어느 한 개인이나 세력, 한 종교나 파당도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확고한 원리가 들어있었다. 이제 그 어떤 확정적인 단일적 또는 양자택일적 선택은 강요될 수 없었다. 각자의 개별적 자율성을 통한 활발한 토론과 공적 의제 설정이 꽃을 피웠다.
하나하나 조사하면 정치에서 법률, 제도·의식(儀式)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개념은 물론 용어조차 같았다. 오늘의 근대를 만든, 그리하여 민주공화국과 민주주의를 만든 최고 지혜였다. 즉 공통 복리(=민주공화국), 공통 감각(=상식), 공통 법률(=보통법), 평민 공통대표(=의회·하원), 공통 규례(=종교개혁), 공통 결정(=보통 시민권) 등을 말한다. 정녕 놀랍지 않은가?
오늘날 한국 정치와 담론에서 진영과 파당의 이익을 강화하는 미시적 이슈가 아닌 거시적 국가 의제는 철저하게 증류된다. 이때 말하는 증류는 심리적·정서적 차원과 정치적·사회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즉, 공동체의 사활이 걸린 핵심적 공통 의제일지라도 진영의 계선을 통과하는 순간 기포처럼 공중에 붕 떠버린다.
그리고는 진영 의제보다 훨씬 덜 실질적이고 덜 팽팽한 의제가 된다. 나아가 관심과 토론, 세력과 힘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실제 현실이다. 국가시민(국민)보다는 진영시민(진민·陣民)으로 존재하는 각 진영과 파당은 공통 의제의 증류와 함께 외려 더 편안한 마음을 갖는다. 확정적 진영 의제에 집중할수록 더 지지받고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공 의제의 실종과 악화는 진영 정치와 포퓰리즘의 악성 조합의 산물이다. 진영 정치가 공공 의제를 정치의 중심 영역으로부터 밀어낼 뿐만 아니라, 공공 의제가 사라진 영역은 갖은 파당적 의제와 주장이 과대 대표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영 간, 진영 내 이슈를 둘러싼 사소한 갈등은 더욱 크게 부각되어 전체 공공 의제들을 압도한다. 그 결과는 지금 한국 사회의 끔찍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이 사회 속의 삶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진영 의제와 공통 의제 각각의 정책 연속성과 단절성, 개선과 악화를 잠시만 들여다보면 이러한 진단에 대한 파당적 반론이 옳지 않다는 것은 금방 드러난다. 공동체의 보존과 사활이 걸린 공통 의제들은 악화를 거듭하고 있지 않은가. 지정석 갈등의 정치에서는 자기 파당과 자기 진민의 지지를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지, 진영을 넘는 공동체 문제의 해결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가공할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승자독식의 철폐 및 권력분립과 협치, 지방분권과 지방소멸, 세계 최고·최악의 자살률, 세계 최장·최저 출산율과 국가소멸 위기,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기후응급 상황과 지속가능한 발전…. 이 모두는 지금 정부와 의회, 파당과 진민 사이에 격렬히 대립하는 어떤 의제보다 더 깊은 공적 토론과 대안 마련이 화급한 공통 의제들이다.
누가 먼저 나라와 국민을 죽이는 정치에서 벗어나 나라와 국민을 살리는 정치로 나아갈 것인가? 진영 의제에서 벗어나 공공 의제로 나아가는 애국적 고뇌와 담대한 용기가 그 출발점이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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