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더 변해갈지 두렵다" 홍명보 감독에게 보내는 '찐팬'의 편지
[풋볼리스트] 조효종 기자= 홍명보 감독의 대표팀행 결정은 오랜 팬의 기대감마저 실망감으로 바꿔놓았다.
대한축구협회(KFA)가 내린 홍 감독 선임 결정의 파장이 거세다. 막바지 선임 작업을 주도한 이임생 KFA 기술총괄이사가 배경을 설명했음에도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감독 선임에 참여한 박주호 전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이 전력강화위 활동 당시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면서 비판이 더 커졌다.
10일 홍 감독은 감독 선임 발표 이후 처음 공식 석상에 등장했다. "축구 인생 마지막 도전", "나를 버렸다",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비장한 마음가짐을 전했으나 싸늘한 시선은 가시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홍 감독을 우상으로 여겼던 팬조차 홍 감독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 10일 밤 자신을 홍 감독의 오랜 팬이라고 소개한 이승용 씨가 홍 감독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풋볼리스트'에 편지를 전해왔다.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편지 내용을 소개한다. 감정적인 비평으로 보이는 구절도 있지만, 홍 감독을 조롱하지 않고 사랑하는 축구팬들이 그와 축구협회에 어떤 심경인지 잘 대변한다고 생각해 그대로 싣는다.
<나의 영웅 홍명보 감독님께>
당신을 존경해왔습니다. 축구선수. 영원한 리베로, 대한민국 No.20. 홍명보라는 이름은 어느덧 40대로 접어든 어린 소년들에게는 우상 외에 그 무엇도 아닙니다.
당신이 런던 세대를 어린 시절부터 이끌며 마침내 세계 강호들 가운데 구릿빛 영광을 누렸을 때 당신 이름 석자 앞에는 "위대한" 이라는 칭호의 작위를 내려도 아쉽다 할 사람 그 누구도 없었겠죠.
그런 당신이 희생을 자처하여 14년 월드컵에서 도전하고, 실패 후 처참히 버려졌을 때 저도 가슴이 메듯 아팠습니다. 결코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될 사람. 대한민국이 나를 버렸다는 그 말 앞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당신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행정가로서도 당신은 개혁가였습니다. 14년부터 무너져내리던 축구계를 바로 세웠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선진적 시스템이 조금씩 자리 잡았고 22년 카타르 월드컵은 4년이라는 고집스럽고도 침착했던 인내 끝에 국제 스탠다드에 맞는 축구로 16강이라는 결실을 이루어냈습니다. 당신의 공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축구 무대에서 다시 한번 꽃을 피우셨죠. 울산HD는 전북현대라는 1강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축구 바람을 불러왔습니다. 나의 위대한 영웅이 다시금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건 라이벌 팀의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번의 선택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축구계는 축구협회의 무분별하고 비상식적인 행정으로 사상 유례없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루어낸 시스템이 폐기되고 절차 없는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당신이 만들어낸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낸 16강을 기념하여 승부조작범을 사면해 주려던 곳입니다. 스스로의 입신양명을 위해 광대를 감독으로 내세워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꼭두각시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곳입니다. 5개월의 장고 끝에도 감독 하나 선임하지 못하여 당신 앞에 울고 매달리는 무능하고 뻔뻔한 곳입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 모든 일련의 사태 속에서 가장 중책을 맡은 수장은 이 모든 일을 뒤에서 방관한 채 말이 없습니다. 이곳이 바로 당신이 되돌아갈 곳입니다. 많은 이들이 홍명보에게 분노하는 것은 개혁가인 줄 알았던 당신이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부역자에 지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배신감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러합니다.
왜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홍명보라는 이름은 앞으로도 우리나라 축구계를 이끌어갈 개혁가입니다. 당신이 이룩해나갈 일들이 많은데 어째서 겨우 4년에 한번 있는 대목만을 바라보며 당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걸려고 하나요? 건전한 축구문화를 위해서는 이 문화 바꿔야 하지 않나요? 일상속에서 축구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승리의 영광을 나누는 것보다 축구인으로서 더 행복한 일이 있을 수 있는 건가요? 그런 문화를 만들어갔을 때 우리는 단순히 4년이 아닌 40년 후까지 그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당신은 망가진 조직과 그 체계 안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혐오하는 조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개혁가의 이미지가 부역자의 이미지로 변질되는 데는 겨우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데, 그 안에서 또 얼마나 변해갈지 두렵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축구 앞에 너무나도 순수합니디. 스스로 한국 축구를 위해 자신을 버렸다고 한 말. 그 말은 진심이었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조직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 혼란 속 단순한 희생양에 불과하지는 않을지. 당신이 진심을 담은 그 말이 축구를 위한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만 마지막 순간 희생이 아닌 폐기 처리되지는 않을지 벌써부터 두렵습니다.
당신을 언제나 응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당신이 잘못되지는 않았을지요. 보십시오. 그 조직, 10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괴로운 시간 속 함께 벼텨내 줄 이 하나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나의 영웅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당신의 선택 앞에 무너지거나 좌절하지 않길.
사진= 풋볼리스트,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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