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남자와 느린 여자, 둘의 사랑이 주는 여운

김형욱 2024. 7. 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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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1초 앞, 1초 뒤>

[김형욱 기자]

 영화 <1초 앞, 1초 뒤>의 한 장면.
ⓒ 블루라벨픽쳐스
 
하지메는 빠르다. 늘 남들보다 한 발 앞선다.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뭐 하나 잘되는 게 없다. 남들과 속도를 맞추지 못하니 말이다. 우체국 배달원을 하다가 속도위반으로 사무직을 하게 된 하지메는 우연히 뮤지션 사쿠라코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어느 날 드디어 잡은 정식 데이트 기회, 하지만 눈을 떠 보니 다음 날 아침 집이 아닌가? 지난 시간의 기억은 새카맣게 사라졌다.

레이카는 느리다. 어릴 때 큰 사고를 당해 부모님을 여의고 그녀도 크게 다쳤다. 늘 남들보다 한 발 늦다. 당연히 좋을 게 없다. 뭐 하나 잘되는 게 없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순간을 잡아 보려 사진을 시작했다. 잘 찍을 리가 만무하다. 어느 날 우연히 하지메를 본다. 하지메는 어렸을 적 병원에서 레이카에게 매일같이 말을 걸며 그녀에게 삶의 이유를 부여해 준 장본인이었다. 레이카에게 의미 있는 존재.

하지만 하지메는 레이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우체국에 가끔씩 찾아오는, 그러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소녀일 뿐이다. 그런데 하지메는 사쿠라코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일어난 일련의 일을 되짚어가는 과정에서 레이카의 존재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 어렸을 적 둘이서 한 약속도 기억해 낸다. 

그렇게 하지메는 레이카가 우체국에 방문하길 기다리는데 레이카는 오지 않는다. 하지메와 레이카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기억하는 상태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
     
<1초 앞, 1초 뒤>는 2020년 현지 개봉한 대만 영화 <마이 미씽 발렌타인>을 리메이크한 일본 영화다. 원작은 중화권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금마장 영화제 제57회에 5관왕(장편영화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시각효과상)을 차지하며 큰 화제를 뿌린 바 있다. 영화가 줄 수 있는 가장 극점의 것들을 선사한 것이리라.

그런데 영화는 중반까지 딱히 별다를 게 없다.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사는 하지메, 일본어로 시작 또는 처음을 뜻하며 표기도 '일(一)' 자로 하는 하지메의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빠름, 빠름'을 외치는 세상이라지만 그가 사는 곳은 '1000년의 수도' 교토이니 만큼 그리 메리트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사는 레이카가 스토리의 메인 시선으로 등장하며 급변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에선 의미 없던 것들이 그녀의 시선에선 의미가 있었다. 그 자체로 빠른 것보다 느린 것이 세상을 더 잘 보고 나아가 더 잘 살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은유라고 하겠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은 것은 아냐'라는 노랫말도 있지 않은가.
 
 영화 <1초 앞, 1초 뒤>의 한 장면.
ⓒ 블루라벨픽쳐스
      
배경이 교토라는 게 매우 탁월하다. 교토는 9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의 수도였으니 '천년고도'라고 할 만하다. 한국의 경주를 떠올리면 될 텐데 그곳에서 '시간'에 관한 영화를 찍으면 얼마나 뜻깊겠는가. 마치 도시가 사람들의 시간을 일일이 체크하고 간섭하는 것 같다. 균형이 맞춰진다고 할까, 극 중 하지메와 레이카처럼.

사실 하지메가 잃어버린 혹은 삭제된 시간은 그가 오랫동안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쓴 시간의 집합체다. 무언가가 그에게서 시간을 뺏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멈추고, 멈춘 시간 동안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반면 레이카는 시간을 얻었다. 시간은 상대적이기에 남들이 그동안 그녀보다 빨리 시간을 보낸 만큼 얻은 것이다.

하여 레이카가 무엇을 했냐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지메를 데리고 다니면서 따로 또 같이 사진을 찍었다. 멈춰 있을 때 찍으니 더할 나위 없이 잘 찍을 수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대상과 오롯이 함께할 수 있었고 또 남들보다 느려서 힘들고 손해 봤던 일상을 보상받았다고 생각했다.

영화라는 장르가 시도할 수 있는 것들
     
로맨틱코미디 기반에 SF적인 요소가 가미된 이 영화는 아이디어가 상당히 기발하다. 그리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아이디어를 잘 이용했다. 덕분에 재미와 의미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시종일관 재밌게만 봤다가 끝나고 나니 여운이 밀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이카가 남들보다 느리다는 이유로 몰래나마 하지메의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지메가 시간을 잃어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레이카에 의해 이리저리 다니며 사진을 찍힌다거나 하는 모습이 자못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코믹하다면 코믹한 부분들인데 엽기적으로 그려질 요량도 충분하다. 그 지점이 영화의 키포인트인 한편 아쉬운 포인트였다.

그럼에도 흔하지 않은 류의 로코물이었으니 소임은 다하고도 남았다. 영화는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물론 과정에서 빚어지는 생각지도 못한 부정적 이슈를 각오해야 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하지만 하지메보다 레이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더 많다. 그녀에게 정이 가고 또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그게 인지상정인가 보다. 빠름이 인정받고 이득을 보는 세상이지만 느림이 인정받지 못하고 손해 보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 <1초 앞, 1초 뒤> 포스터.
ⓒ 블루라벨픽쳐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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