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극찬한 천재는 왜 변절의 상징이 됐을까

이준목 2024. 7. 1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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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이준목 기자]

 변절의 대명사 신숙주의 진실
ⓒ tvN 스토리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조선 초기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세종에서 성종까지 무려 여섯 명의 임금을 보좌했던 당대의 명신이었다. 능력과 업적에 있어서는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재상 중 한 명으로 꼽아도 부족함이 없다. 동시에 신숙주는 유교적 정통성과 질서를 강조하던 조선에서 쿠데타에 동조해 자신이 모시던 군주를 배신한 희대의 '변절자'라는 평가도 따라다닌다.

7월 10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16회에서는 '세조의 참모 신숙주는 정말 변절자였나'에서 신숙주의 두 얼굴을 조명했다.

다방면에 탁월한 명신

신숙주는 1417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 신장을 따라 한성에 올라왔고, 23세가 되던 1439년(세종 21년) 과거에 급제하여 궁중제사에 쓸 곡식을 관리하는 관청인 전농시(典農寺)에서 종7품 직장(直長)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신숙주는 진사시, 생원시, 문과 등 국가시험을 연이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할 만큼 촉망받는 수재였다.

집현전(集賢殿)은 세종 시대에 나라를 이끌 젊은 인재들을 모아놓은 현대판 싱크탱크였다. 신숙주는 남다른 재능을 인정받아 집현전에 배치되었고, 여기에서 훗날 사육신의 일원으로서 정치적인 반대편에 서는 성삼문과 처음 만난다. 비슷한 나이였던 두 사람은 함께 학문을 연구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됐다. 집현전에서 숙직하면서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든 신숙주의 모습을 보고 세종이 기특하게 여겨 자신이 입고 있던 용포를 벗어 덮어줬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또한 신숙주는 조선 역사상 정도전, 황희, 류성룡 등과 더불어 손에 꼽을 정도로 다방면에 두루 탁월했던 명신이었다. 신숙주는 일본 전문 외교관으로 여러 차례 현지에 파견되었고, 당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최초로 정리한 '해동제국기'를 편찬했다. 훈민정음 제작에도 참여한 신숙주는 친구 성삼문과 함께 십여 차례나 자료 수집을 위하여 중국 요동으로 파견을 다녀오기도 했다. 신숙주는 중국어와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 등을 구사했고 번역까지 가능할 정도로 언어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신숙주를 두고 "큰 일을 맡길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또한 세종은 종종 아기였던 손자 단종을 안고 집현전을 찾아 신숙주와 성삼문 등에게 "내 사후에 이 아이를 잘 보필해 주라"고 당부했다. 명군인 세종이 직접 인정하고 조선의 미래를 맡길만하다고 평가할 만큼 신숙주의 능력을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양대군 손 잡은 신숙주

하지만 1450년 세종이 사망하고, 불과 2년 뒤엔 아들 문종까지 요절하면서 평온하던 조선의 역사는 요동친다. 왕위를 이은 단종은 아직 11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고명대신인 김종서, 황보인 등이 사실상 국정을 주도했다.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왕위에 대한 야심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신숙주는 종친이면서 비슷한 동년배였던 수양대군과 일찍부터 사이가 가까웠고, 수양대군 역시 신숙주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1452년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하기 위하여 당시만 해도 위험했던 명나라 사행길을 함께 다녀올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신숙주는 왜 수양대군과 손을 잡게 되었을까. 당시 집현전은 일부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김종서를 비롯한 노신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데 반감을 드러내던 세력들이 존재했다. 신숙주 역시 반(反) 김종서 세력의 대안으로서 당시 종친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던 수양대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마침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와 고명대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그런데 신숙주는 정난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2등 공신에 책봉된다. 반대파를 모두 제거한 뒤 남은 문신들을 포섭하기 위한 수양대군의 정치적 술수였다.

신숙주는 처음에는 한 차례 공신 책봉을 사양했으나 결국 받아들인다. 훗날 단종복위를 시도하게 되는 성삼문 역시 정난과 무관하게 3등 공신에 책봉된다.

이때만 해도 신숙주가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미리 알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동의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당시는 수양대군이 아직 본격적인 왕위 찬탈의 야망을 드러내기 전이었고, 단종을 지지하면서도 김종서와 고명대신들을 비판하던 집현전 학자 중에는 계유정난의 당위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려는 분위기도 존재했다. 신숙주와 성상문 역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어차피 수양대군의 권력장악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고 저마다 앞날을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1455년 8월,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끝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되면서, 신숙주와 성삼문, 두 친구의 운명도 엇갈리기 시작한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당시 승정원 동부승지(국왕의 비서관)였던 성삼문은 옥새(임금의 도장)를 차마 세조에게 전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복하고 있던 세조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울고 있는 성삼문을 빤히 쳐다봤다.

반면 신숙주는 세조가 즉위하자 일등 공신으로 책봉된다. 이 무렵의 신숙주는 세조의 최측근이자 계유정난의 주역이던 한명회와 사돈까지 맺는가 하면, 훗날 자신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면서 세조와 완벽한 운명공동체로 전향한다. 그해 10월에는 명나라에 세조의 즉위를 알리고 책봉을 요청하는 특사로 파견된다. 세조가 왕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가장 막중한 임무를 신숙주에게 맡길 만큼 남달리 신임했다는 걸 보여준다.

신숙주가 무사히 책봉을 받고 명나라에서 귀환하자 세조는 버선발로 나와 맞으며 환대했다. 세조는 신숙주에게 술을 따라주며 "옛날 먼 길을 함께하며 꿈꿨던 중대한 일을 이제야 이뤘으니,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라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한편 성삼문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며 역쿠데타로 세조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성삼문은 절친한 친구였던 신숙주마저 살생부 명단에 올릴 것을 제안할 만큼 단호한 의지를 드러냈다.

세조 암살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로 끝났다. 계획이 누설될 것을 우려한 김질의 밀고로 암살모의가 발각되고 성삼문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모두 체포된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성삼문은 끌려와 잔혹한 국문을 받으면서도 세조를 수양대군 시절의 호칭인 '나으리'로 부르며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천륜을 어겼으니 왕이 아닌 도둑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성삼문은 신숙주에게도 "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고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생각달라'는 말씀이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잊었는가. 너의 악함이 이 정도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고 선왕의 유훈을 저버린 옛 친구를 신랄하게 꾸짖었다.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은 결국 모두 처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단종은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당하며 궁을 떠나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정치적 노선은 달랐지만 옛 동료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게 된 신숙주의 마음도 결코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은 신숙주
 
 국가유산청이 현존하는 공신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신숙주 초상'을 국보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3일 밝혔다. 사진은 '신숙주 초상' 2024.7.3
ⓒ 연합뉴스
 
하지만 신숙주는 자신의 선택을 결단코 후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57년 10월, 신숙주는 후대에 '변절자'의 오명이 영원히 굳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꺼내게 된다.

바로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제거할 것을 신숙주가 요청한 것이다. 폐위되었다고는 하지만 정통성과 질서를 강조하던 유교 국가 조선에서, 한때 자신이 모시던 옛 임금을 신하가 죽이라고 요청한다는 것은,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정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당시 세조 정권은 사육신 사건 이후에도 종친인 금성대군이 또 다른 역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적발되는 등, 정국이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단종은 폐위된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 자체만으로 반대파들의 구심점이 되었기에, 세조 정권에는 가장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는 골칫거리였다. 이미 세조와 완전히 운명공동체가 된 신숙주에게, 단종은 더 이상 자신의 옛 군주가 아니라 그저 제거해야 할 핵심 정적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인 1457년 10월 21일, 단종은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에서 끝내 세상을 떠난다. 신숙주가 원했던 결말대로였다. 단종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약을 받았다는 설, 자살설 등이 거론되며 적어도 세조의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것은 후대의 역사기록과 학계에서 모두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신숙주는 이후로도 세조 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 1459년 11월에는 불과 42세의 나이에 신하로서 최고위직인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른다.

실록에 따르면 세조는 공식 석상에서 '신숙주는 나의 위징'이라고 칭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위징(魏徵)은 중국 당나라 시대 태종을 보필하며 문화통치를 이끈 명신으로 꼽힌다. 본래는 태종의 형인 이건성의 책사였으나 태종이 정변을 일으켜 형을 제거하고 집권하자 귀순하여 태종에게 충성을 바친 인물이었다. 역시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신숙주와의 관계를 당태종과 위징에 빗대는 것으로 자신의 안목과 업적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실제로도 신숙주는 위징과 마찬가지로, 단지 주인(당태종, 세조)에게 충성하며 권력에만 영합한 인물은 또 아니었다. 의외로 신숙주는 공신들의 횡포와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하던 세조 정권하에서 소신 있게 바른말을 하던 몇 안 되는 신하였다. 무조건 공신들을 비호하던 세조의 감찰이 잘못되었다며 대놓고 쓴소리를 했던 기록도 있다. '세조를 왕으로 만든 것'이 한명회였다면, '세조를 왕답게 만든 것'은 신숙주라는 평가도 있을 만큼 그가 남긴 영향력은 결코 작지않았다.

또한 신숙주는 세조와 예종이 사망하고 9대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말년의 신숙주는 학자로서 편찬 작업에 전념하면서 <경국대전>의 완성을 비롯해 역사서, 예법서, 법전, 외교서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기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신숙주의 도덕적인 처신과 별개로 그가 조선의 통치제제를 완성한데 기여한 공로는 결코 적지않다는게 학계의 평가다.

나이가 들어 신숙주는 건강을 이유로 몇 차례나 사직을 요청했으나 국왕 성종과 수렴청정 중이던 정희왕후(세조의 왕비)는 세조의 유훈을 언급하며 번번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1475년 8월 1일, 57세의 신숙주는 영의정에 재임하던 도중 결국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신숙주 사후 200여 년이 흘러, 조선 19대 국왕 숙종은 1691년 9월 '역사 바로잡기'에 나서면서 단종과 사육신의 지위를 모두 복권시킨다. 이미 이전부터 조선의 유학자들과 일반 백성들 민간에서는 단종에 대한 동정여론이 높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공식적으로 사육신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단종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성삼문과 달리, 신숙주에게는 충의를 저버린 변절자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더 후대인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나라를 저버린 친일매국노들에 부정적이었던 시대상이 투영되면서 신숙주의 변절자 이미지도 더욱 굳어진다. 이광수가 집필한 <단종애사>에서 신숙주는 자신의 이익만을 쫓아 의리를 가볍게 저버리는 소인배로 묘사됐다.

우리에게 친숙한 '숙주나물'의 본래 이름은 녹두나물이다. 마치 상하기 쉬운 녹두나물처럼 사람의 절개도 쉽게 변한다고 비꼬는 의미에서 신숙주의 이름이 숙주나물의 어원이 되었다는 학설도 유명하다. 한편으로는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며 영원한 '충절의 대명사'로 남게 된 친구 성삼문의 행적과 대조되어, 지금도 신숙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리고 있다.

신숙주는 과연 옛 주인과 동료들을 배신한 비겁한 기회주의자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흐름과 실리에 맞춰서 움직였던 냉철한 현실주의자였을까.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신숙주의 행적이 주는 복잡한 양면성은 지금도 우리에게 정치와 인간의 속성을 연구하는데 좋은 교훈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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