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창설' 주장한 이 소령은 누가 죽였나
[김도균 기자]
▲ 진실화해위 진상규명 결정을 보도한 기사를 보여주고 있는 고 이상규 해군 소령의 아들 이동춘씨 |
ⓒ 김도균 |
"아직 싸움이 다 끝난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던 배경에는 누군가가 전공을 탈취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왜곡된 역사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합니다."
1950년 7월 육군 헌병대에 의해 총살당한 고 이상규 해군 소령의 차남 이동춘씨는 최근 나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 결정 소식에도 내내 담담한 표정이었다.
지난 6월 11일 진실화해위는 전원위원회를 열고 1948년 군권을 파괴할 목적으로 '해상인민군'에 가입하고 조직 수괴로부터 비밀서신을 수령했다는 혐의로 연행돼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육군 헌병대에 의해 총살당한 고 이상규 소령 사건이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면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관련 재판 판결문, 피해자 및 관련자 수용기록, 형사사건부 등을 조사해 이 소령의 근무 시간과 지역 등을 토대로 범죄 사실에 명백한 오류가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유족에게 사과와 함께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의 명예회복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74년 만에 아버지의 무고함을 밝힐 수 있는 신원(伸冤,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의 길이 열렸지만 이동춘씨가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이유는 이상규 소령 사후 그의 전공을 엉뚱한 사람이 빼앗아 갔다는 의혹 때문이다. 이씨는 지난 2000년대 초부터 전국 각지를 오가며 아버지의 전공이 기록된 자료를 찾아 3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으로 엮었다. <진상규명 신청서>라는 제목이 인쇄된 책자는 그 자체로 이상규 소령과 여순사건 전후 한국 해군의 작전을 꼼꼼히 기록한 역사 자료다.
이씨는 지난 6월 초 <오마이뉴스>로 전화해 담당 기자인 필자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지난 6월 18일 오후 이씨가 살고 있는 경남 양산시의 한 커피숍에서 이씨를 만났다. 이씨는 시종일관 차분하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지만, 때로는 감정이 북받친 듯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다.
▲ 2019년 4월 15일 창설 70년을 맞은 해병대 |
ⓒ 해병대 |
같은 해 11월 25일 여순사건 해군 작전이 종료되었고, 이 소령은 임시 정대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11월 30일 '충무공정' 정장으로 해군 진해 기지로 복귀했다. 이 소령은 실전을 통해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함정의 무장을 강화하고 육상 전투를 담당할 육전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실전 보고서'를 작성해 당시 해군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에 기여했다고 한다.
'해상인민군' 혐의로 끌려가 한국전쟁 직후 총살
하지만 그해 12월 초순 관사에서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이 소령은 방첩대에 의해 연행됐다. "정당한 군권을 파괴할 목적으로 '해상인민군'에 가입해 같은 조직 수괴로부터 비밀서신을 수령했다"는 혐의였다.
이 소령 체포 당시 만삭이었던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이씨는 아버지가 체포되고 며칠 뒤 태어났다. 이씨는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뱃속의 아들이 죽으면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것이고, 아들이 살면 남편은 죽을 것'이라고 점쟁이가 말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점쟁이의 말은 현실이 됐다.
가족들은 백방으로 이 소령의 행방을 수소문 했지만, 반년이 가깝도록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어머니가 마산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를 면회할 수 있었지만,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지 아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나중에 어머니는 해군 관사 옆 헌병대 영창에서 들리던 절규가 남편의 비명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두고두고 가슴을 치곤했다.
해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이 소령은 1949년 6월 해안경비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징역 2년으로 감형되어 마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 소령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24일 육군 헌병대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31살, 만기 출소를 코앞에 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 고 이상규(1920~1950) 해군 소령. 여순사건 당시 임시정대를 지휘한 실전 경험을 토대로 육전대(해병대) 창설을 최초로 제안했다. 이후 '해상인민군'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 수감 중 한국전쟁 발발 직후 헌병에 의해 처형 당했다. |
ⓒ 이동춘씨 제공 |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 온 이씨는 직장에서 은퇴한 20여 년 전부터 좌익사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노력의 결과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부산·경남 지역 재소자 희생사건 결정서>를 통해 이상규 소령의 사망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또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상규 소령이 가입했다는 해상인민군의 실체나 존재 여부를 인정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 이 소령이 이 단체에 가입했다거나 조직 수괴로부터 비밀 서신을 수령했다는 혐의는 이 소령의 근무 시각 및 지역, 근무 이력 등 객관적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 내용에 명백한 오류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상규 소령의 군사재판 판결문에는 "1948. 10. 22 오전 1시경 진해 해군 영창에 구속 중인 해상인민군 수괴 병조장(상사) 이OO로부터 비밀서신을 일등병조(중사) 심OO을 통해 수령"했다고 적시하고 있는데, 이 시각 이 소령은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순천 부근 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 같은 기록은 <대한민국 해군사>와 <한국전쟁사연구> 같은 정부기관이 공식 편찬한 공간사(公刊史)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비밀서신을 전달했다는 심OO 역시 같은 시각 육상(진해)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비밀서신을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당시 자료에선 아무런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조직의 실체도 불분명하고, 구체적인 범행 사실 역시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징역형이 선고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소령이 연행 시점부터 해양경비법 위반으로 기소되기까지 최소 79일 이상 불법구금을 당했고 수사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자행됐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만주군 출신들에게 전공 빼앗기고 빨갱이로 몰려 죽어"
다만 진실화해위는 이씨의 신청 취지 중 해병대 역사 왜곡과 은폐 여부에 대한 조사는 진실규명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씨가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한 부분이다. 이씨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나 외삼촌, 전역한 해군 관계자들로부터 "너희 아버지는 여순 사건 때 함정 지휘관으로 참전해 큰 공을 세웠지만, 만주(일본)군 출신들에게 전공을 빼앗기고 '빨갱이'로 몰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누누이 듣고 자랐다고 했다.
이 폭도진압작전기간에 있어서 실전을 통한 경험은 아(我)해군 발전에 적지 않은 참고가 되었으니 당시 임시편대지휘관이었던 이상규 소령이 제출한 실전보고서 중에 다음 몇 가지는 주목되는 바가 있다.
1) 아 함정은 방어무기의 불충분으로 접근교전에 불리를 면치 못하였음.
2) 공격병기가 빈약하여 철저히 제압할 수 없음.
3) 통신연락에 있어서 총사령부 기지함정 파장에 동일하므로 통신의 지장이 지대한 파장종별을 삼종이상(三種以上)으로 판정할 필요가 있음.
4) 해군은 해상전투가 주목적이나 육전대의 필요를 절감하였음.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연구> 제1편 (1966년 3월 간행)
이씨는 특히 이 소령이 역설한 '육전대의 필요성'이 해병대 창설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해병대 창설 최초 제안자에 대해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고 신현준 해병 중장과 제6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고 공정식 해병 중장은 각자 본인의 업적이라고 주장해 왔다.
나는 해군 함정 4척을 이끌고 출동하여, 우선 여수항 주변 일대를 점령한 다음, 해상으로부터 반란군을 진압하는 임무에 종사하였다. 이 작전이 끝난 뒤, 나는 해군의 상륙 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 즉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부기한 전투상보를 제출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 해병대 창설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첫걸음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공정식 장군은 2009년 쓴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작전이 끝난 뒤 공격 무기가 빈약해 작전에 차질이 있었다는 내 전투보고서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직속상관 신현준 정대사령관에게 올린 전투상보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적시했다.
1. 방어 무기가 불충분하여 근접교전에 불리하였음.
2. 공격무기가 빈약하여 적을 철저하게 제압하기가 어려웠음.
3. 통신연락시 해군 본부와 기지, 함정의 주파수가 동일하여 상호통신에 지장이 있었음.
4. 해군은 해상작전이 주목적이지만, 이번과 같은 사태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해병대 창설이 절실히 요청됨.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했던 두 장군이 회고록을 통해 서로 자신이 해병대 창설을 최초로 제안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정부 기관이 편찬한 공간사(公刊史)에는 분명히 육전대(해병대) 창설을 포함한 실전보고서 작성자를 이상규 소령으로 적시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을 따르는 민족주의 성향의 장교
국방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사>를 보면 여순사건 당시 일곱 척의 배를 지휘한 임시정대 사령관이 이상규 소령이었으며, 해병대의 필요성을 주장한 보고서를 작성한 주체 역시 신 장군이나 공 장군이 아니라 이상규 소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정보부가 펴낸 <북한대남공작사>도 당시 임시정대 사령관은 이상규 소령으로, 해병대의 필요성을 주장한 실전보고서 작성자 역시 이 소령으로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불일치는 무엇 때문에 기인한 것일까.
▲ 1946년(사진 설명에는 단기 4279년) 9월 15일 조선해안경비대 진해 기지를 방문한 김구 선생과 경비대 간부들.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흰 제복을 입은 이가 이상규 중위(당시 계급). |
ⓒ 이동춘씨 제공 |
문제는 이 과정에서 좌익뿐 아니라 중도·민족주의 성향의 군인들까지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점이다. 이씨는 이상규 소령이 백범 김구 선생을 따르는 민족주의 성향의 장교였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줄곧 들었다고 했다. 실제 이 소령이 해군에 투신한 직후인 1946년 9월 백범 선생이 해군 진해 기지를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 속에는 이상규 소령(당시 중위)도 나와 있다. 당시 백범 선생은 "이군에게"라는 친필 서명을 한 <백범일지>를 이 소령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씨는 이 소령이 억울하게 희생된 후 해군과 해병대가 공식적인 역사에서 이 소령의 존재를 지우려고 했고, 그의 공적 역시 엉뚱한 사람들이 가로채 갔다고 주장한다. 이씨는 특히 당시 해군 수뇌부가 아버지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침묵했음은 물론, 이 소령이 제거된 후 그의 업적이 다른 사람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관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이를 제대로 바로잡는 것은 아들로서의 도리일 뿐만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할 마땅한 책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아버지의 재심 청구와 더불어 공식기록에서 사라지거나 변조된 이상규 소령의 업적을 오롯이 복원하는 것이 여생의 목표라고 했다.
"처음엔 해군과 해병대가 없다고 딱 잡아떼던 자료들을 발품 팔아 가면서 일일이 다 확인해서 알려주기까지 했어요. 그런데도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아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2차 가해와 다름없습니다. 해군과 해병대는 지금이라도 빼앗긴 아버지의 공적을 제대로 조사해 바로잡기 바랍니다. 비록 나이가 들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지만, 죽는 날까지라도 싸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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