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cm 남자·145cm 여자, 우리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조영준 기자]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영원히 당신만을> 스틸컷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영원히 당신만을>
독일 / 2024 / 극영화
감독 : 엘리엇 루이스 맥키
"단 몇 초로 인생의 경로가 바뀔 수 있어. 우리의 예정된 삶이 무덤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을 하고 연인이 된다는 것은 공동의 시간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각자의 시간을 서로의 시간 위에 나눠 맡기고 포개는 일. 다시 말하면, 내게 주어진 상대의 시간을 지키고 간직하는 과정이다. 노력은 할 수 있지만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때도 있다. 서로를 여전히 사랑하는 두 사람은 이별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영역 바깥으로부터 찾아오는 불의의 사고와 같은 것이 있다. 이때 남겨진 사람의 움직이는 시간 위에는 생동을 잃고 잿빛으로 멈춘 이의 시간이 건네진다. 인생의 경로가 바뀌는 순간이다.
영화 <영원히 당신만을>은 발레리아(안드레아 아리엘 분)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식물인간이 된 남자친구 세바스찬(제임스 터프트 분)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가 4시간씩 돌보는 인물이다. 멍하게 뜬 눈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의 앞에서 그녀는 절절한 러브레터를 읽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기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담겼다. 엘리엇 루이스 맥키 감독은 한 사람의 일방적인 사랑 고백을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대한 다면적 고찰을 성취하려 한다.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다른 세상에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욕망의 언저리까지 전부 다.
영화 초반부에 놓이는 건 사랑의 맑고 투명한 쪽이다. 가끔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남자친구의 병실을 떠나지 못하는 발레리아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전의 자신이 사라진 것만 같은 기분, 생전에 느끼게 될 것이라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 종국에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를 자신의 삶 속에 유령처럼 들어와 선사한 남자를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 함께한 모든 순간이 현재의 감각처럼 떠오르는 발레리아에게 지금의 현실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첫 만남의 순간이 담긴 장면을 시작으로 쌓이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발레리아가 준비한 편지와 함께 사랑에 대한 찬사를 노래하는 듯하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초입에서 경험했던 바로 그 감정이다.
사랑하는 일의 다면적 고찰을 성취한다는 말에는 어둡고 혼탁한 쪽의 모습도 담긴다는 의미도 있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지던 세바스찬의 외도와 미행 끝에 직접 확인하게 되는 밀회의 순간까지. 뜨겁게 타오르기만 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사랑에도 냉각기가 찾아온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매일 밤 꿈에 그리던 소원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쓰지 않고 모아 왔던 발레리아에게는 믿음의 결과를 스스로 해체하고 그 감정의 모양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비록 자신의 사랑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희생이라는 또 다른 행위로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다시 한번 나아가 이 사랑을 완성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끌어낸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러브 디스크> 스틸컷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러브 디스크>
한국 / 2024 / 극영화
감독 : 서수정
"우린 우주에 갈 거야. 두 발이 다 뜨니까."
하리(김유은 분)의 키는 145센티미터다. 남자친구 묵(윤혁진 분)의 키는 190센티미터다. 두 사람은 45센티미터나 차이가 난다. 연인인 두 사람에게 의사는 이별을 권고한다. 이 만남이 서로의 디스크를 위협하고 있어서다. 인간은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고 쉽게 꺾이고 부서지는 존재다.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 하리의 집은 묵에게 너무 낮다. 천장에는 그가 머리를 부딪히며 생긴 흔적이 가득하고, 그 수만 벌써 700개가 넘어섰다. 가끔 피를 보는 날도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단편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키 차이로 인한 불편함은 꽤 자주, 생각보다 더 많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 지인들 역시 두 사람의 만남을 축하보다는 걱정과 호기심으로 바라본다.
서수정 감독의 영화 <러브 디스크>는 연인의 키 차이를 소재로 사랑이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달콤살벌한 이야기다. 하리와 묵 두 사람은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지만 키 차이가 서로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별을 고민한다. 조금 특별하긴 했지만 다른 사랑은 아니었다.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울고, 다투기도 하고 보살피기도 했던 시간이다. 이별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팔에서 잘라낸 뼈를 다리에 이어 붙이는 '신체연장술'이라는 수술을 받는 것뿐이다. 하리의 키를 키우는 방법이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극단적으로 설정된 건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두 사람이 적절한 지점에서 타협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어서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또 상대적으로 키가 큰 두 사람에게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하리의 낮은 세상과 묵의 높은 세상이 중간에서 서로 만날 수 없기에,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보통의 방법이 아닌 다른 해결책이 요구된다. 두 발이 다 뜰 수 있는 우주가 아닌, 발을 딛고 살아가는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방법.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랑은 지독한 구석이 있다. 하리는 묵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짊어지기로 한다. 팔과 다리를 잘라 드러난 뼈를 망치를 이용해 잘게 부순 뒤에 다시 다리뼈 사이에 넣는 과정. 170센티미터 정도만 되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현실은 언제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영화 <러브 디스크>는 어느 한쪽이 아닌 양쪽 모두에게 이 사랑의 무게를 짊어지라고 요구한다. 이제 묵의 차례다. 키가 작은 사람이 커질 수 있는 노력을 알려주었으니, 그 반대의 노력에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기괴한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의 과정은 어떤 러브스토리보다 순수하고 희생적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극 중 두 인물은 서로의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언제나 자신이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또 도모한다. 상대의 몫을 요구하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그때 당신에게. 사실 그마저도 강요는 하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린다. 그런 모습을 지켜봐 왔던 한 사람이 어찌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놓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분명한 가치 하나를 선보이기 위해 영화는 내내 두 사람을 괴롭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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