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시장 골목에 자리 잡은, 소극장 로즈아트홀 [공간을 기억하다]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투박하지만 정겨운 시장 골목에 피어난 ‘장미’ 한 송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 노원구 석계역 1번 출구 인근은 큰 규모의 전통시장이 했다. 지금은 재개발로 많은 점포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좁은 골목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인들이 있다. 이제는 서울 한복판에서 보기 힘든 정겨운 풍경이다.
도무지 소극장이 있을 거라곤 상상하기 힘든 비좁은 골목, ‘극장’이라고 투박하게 적힌 현판이 관객을 맞는다. 지난 2014년 개관한 소극장 로즈아트홀이다. 정겨운 동네의 풍경과는 사뭇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장미의 진한 향기처럼, 연극을 통해 시장 골목을 향기롭게 물들이고 싶다”는 이정은 대표의 말을 듣고 나면 비로소 극장의 이름이 풍경과 잘 어우러지는 느낌을 준다.
낡은 건물의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익숙한 소극장의 모습이 펼쳐진다. 총 76석의 객석을 보유한 작은 극장에서는 이 대표가 이끄는 극단 기적의 레퍼토리 공연 ‘라면에 파송송’이 오픈런 공연 중이다. 건물의 2층은 단원들이 쉬고, 연습할 수 있는 작은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이 대표는 2층 공간을 단원들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들도 함께 쓸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다.
극장 곳곳에는 ‘사람 냄새’나는 요소들도 돋보인다. 출입문 앞에는 간판 만큼이나 투박한 의자가 놓여 있는데, 어르신이 많은 시장 골목의 특성을 고려해 잠시 앉아 쉬어갈 수 있도록 한 이 대표의 정겨운 마음이 담겼다. 2층의 한쪽 벽면 가득한 책들 역시 청소년들이 이곳을 찾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마음으로 채워졌다. 동네 주민들을 위해 공짜로 공연 티켓을 돌리기도 했다.
“과거엔 차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많은 시장 골목이었어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죠. 그 당시 의자가 생기면 놓고, 스피커가 구해지면 달아가며 몇 년에 걸쳐 극장을 만들었어요. 책장도, 바닥도 심지어 벽도 중고 마켓에서 구해서 한 땀 한 땀 완성했어요. 누군가는 ‘장소를 옮기라’고도 하지만 이곳은 저희에게 매우 애틋한 공간이에요. 풍경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골목에 ‘향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고요.”
"단 한 명의 관객만 있어도 공연은 계속 됩니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이정은 대표는 극단 기적의 막내로 시작해, 현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극단의 당시 대표)의 뒤를 잇게 됐다. 극단의 살림을 책임지게 된 이 대표는 홍대 햄버거 전문점을 비롯해 음식점을 전전하며 리딩을 하는 극단 식구들을 위해 소극장을 직접 꾸리게 됐다.
“극단의 대표 공연인 ‘라면에 파송송’을 올려야 하는데 여러 극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안정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겠더라고요. 당시 제가 혜화에서 자취를 했는데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그 동네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적당한 곳을 찾기 위해 한성대, 성신여대 등 발품을 팔았지만, 그곳들도 역시나 비쌌고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웃음). ‘어디까지 올라가나 보자’는 마음으로 돌아다니다가 석계에 자리 잡게 됐습니다.”
굳이 찾지 않으면 지나치게 되는 곳에 위치한 터라 때론 관객이 단 한 명도 없어 공연을 취소하기도 하고, 한 명의 관객만 두고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2012년부터 강남, 대학로 등의 무대에 올려진 ‘라면에 파송송’이라는 작품의 인지도 덕분에 객석을 꽉 채워 공연하는 날도 있긴 했지만 배우보다 관객이 많은 날도 허다했다.
“외국인들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사실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힘들게 오게 해도 되나’ 싶었죠. 그래도 공연에 대한 정보를 찾아서 이곳까지 찾아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기쁘더라고요. 저희는 단 한 명의 관객이 있어도 공연을 합니다. 어느 날은 관객이 단 두 명이었던 때가 있었어요. 부부였는데 오히려 배우들에게 미안하다면서 공연이 끝난 후에 삼겹살까지 사주시고 가셨어요.”
극의 특성상 관객을 무대에 올려 그들의 스토리를 함께 나누고, 라면을 끓여먹기도 한다. ‘라면에 파송송’이 10여년간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관객은 배우에게 위로를 받고, 배우는 관객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또 엄마가 돌아가신 후 3년이란 시간 동안 대화를 잃었던 한 부녀는 이 무대를 통해 다시 눈을 맞추고 대화를 시작했다.
“저희 극단 이름이 ‘기적’이잖아요. 어렵고 힘든 사람들, 어떤 문제로 인해 낙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에피소드를 만들고 있어요.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희망찬 소리를, 극을 통해 들려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놀랍게도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요(웃음).”
이정은 대표가 꿈꾸는 '사람'을 위한 '무대'
여느 소극장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부침을 겪으면서도 이 대표가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사람’ 때문이다. 최근 노원문화재단의 사업을 통해 청소년들의 극장체험을 진행하면서 “연극하는 사람들은 돈이 없지 않냐”는 한 아이의 질문에 이 대표는 “돈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대표가 보는 가치는 사람과 무대에 있었다.
“사실 저도 월세를 낼 때마다 손이 떨려요(웃음). 그럼에도 이 직업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무대를 지킬 수밖에 없는 거죠. 특히 이 지역에서 자취를 하고, 신혼을 보내고, 첫 아이를 낳기도 했던 터라 동네에 대한 애착이 커요. 그런 지역의 상점들이 재개발로 한순간에 문이 닫히니 속상하기도 하고요. 당시에 사람들이 울면서 문을 닫았어요.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단순히 마음이 아픈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대표는 주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노원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노닥노닥’이라는 사업에 지원해 대본을 쓰고 주민들을 모아 직접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오는 22일 오후 7시30분, 또 한 번의 공연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스토리를 엮은 모래치료,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 어린이 영어 뮤지컬 등 남녀노소할 것 없이 주민들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사업들을 준비 중이다.
“어르신들은 ‘내가 극단 기적의 홍보대사’라고 말씀하고 다니신대요(웃음). 최종적으로는 이 건물을 모든 층을 임대해서 투잡을 뛰는 배우들은 안정적으로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또 동네 주민들은 거부감 없이 이곳을 찾을 수 있게 하나의 센터를 만들고 싶어요. 오래 전부터 꿈꾸던 목표인데, 10년 후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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