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E IN KOREA' 수단으로 전락한 기술철학, 홍명보 감독 선임을 위한 '척화비'
[풋볼리스트] 김희준 기자= 이임생 대한축구협회 기술본부 총괄이사와 홍명보 차기 남자 축구대표팀 감독의 말을 종합해보면 야심차게 준비했다던 한국 축구만의 기술철학이 국내 감독 선임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알 수 있다.
홍 감독은 지난 7일 대표팀 새 사령탑으로 내정됐다. 구체적인 부임 시기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최장 2027년 아시안컵까지 이어지는 계약을 맺었다. 울산HD는 기존에 13일 FC서울전까지 홍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려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10일 치러진 광주FC와 경기에서 민심과 경기력 모두 최악으로 치달은 걸 확인한 뒤 작별시기를 앞당길 계획도 세웠다.
광주전은 경기보다도 홍 감독이 대표팀 선임 후 첫 공식석상이어서 관심이 집중됐다. 울산에서 경기가 치러졌음에도 사전 취재 신청 인원만 54명에 달하는 걸로 알려졌다. 대표팀과 관련해 축구협회에 날선 입장을 고수해왔던 홍 감독은 7일 전격적인 내정 발표 이후 두문불출하며 외부와 접촉을 최소화해왔다.
경기 후 입장을 밝히겠다던 홍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을 통해 대표팀 감독직 수락 과정에 대한 심경 변화를 밝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2014년 이후 10년이 조금 넘었다"며 "2월부터 내 이름이 내 의도와 상관없이 전력강화위원회, 언론을 통해 나온 것에 정말로 괴로웠다. 난도질 당하는 기분이었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며 원래는 대표팀에 갈 생각이 없었음을 드러냈다.
홍 감독은 "7월 5일 이 이사가 집 앞에 찾아왔다. 두세 시간 정도 기다린 이 이사를 뿌리치지 못했고 처음으로 만났다. 이 이사가 말한 건 MIK(Made In Korea)였다"며 "이 이사가 해외에 가서 다른 감독 두 분을 만났고 기술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셨다. 그 부분에 대해 굉장히 강하게 이야기하고 부탁하는 상황이었다"며 외국인 감독 대신 자신이 대표팀 감독으로 선택된 이유가 기술철학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기술철학은 지난달 발표된 한국 축구의 방향성이다. A대표팀 강화를 위해 전 연령별 대표팀에 연속성과 연계성을 주입하기 위해 설정됐다. '빠르고, 용맹하게, 주도하는'이라는 키워드 아래 능동적인 축구를 위한 게임 모델 적용으로 한국 축구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갖추겠다는 선언이었다.
발표 당시부터 기술철학이 국내 지도자의 대표팀 부임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는 있었다. 당시 기술철학 발표에 나섰던 이 이사는 "지금까지 너무 과도하게 군대식이지 않았나. 이제는 그렇게 가면 안 된다"며 아르헨티나를 예시로 선진 축구는 카운터 프레싱이 우수하며 활동량 측면에서 최하위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국 축구도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김지훈 축구인재육성팀장은 관련해 "작년 1월에 기술철학 설정에 착수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후보군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술철학을 발전시켜왔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술철학은 국내 감독 선임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이 이사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걸로 알려진 다비트 바그너 감독이나 다른 외국 감독 거스 포옛 대신 홍 감독을 선임한 이유에 대해 "스스로 이 분들의 축구철학이 한국축구에 맞고 적응이 될까 의문이 있었다"며 "한국이 빌드업으로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데, 프레싱에 대한 철학을 가진 분의 축구를 우리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게 맞는가? 수비라인을 너무 끌어올리다보면 중동 국가에 카운터 어택을 맞을 어려움이 있는데 극복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사실 프레싱, 압박은 기술철학 발표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를 차지하는 요소였다. 이 이사는 기술철학이 적용된 게임모델에 대해 설명하면서 수비 조직에서의 압박, 수비 전환에서 역압박의 중요성을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상기했듯 선진 축구는 카운터 프레싱, 역압박으로 나아가고 있다면서 한국이 이를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감독의 축구가 지금껏 거론된 외국인 감독들의 축구보다 'MIK'에 더 부합한지도 의문이다. 울산과 광주의 대결은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줬다. 울산은 광주를 상대로 빠르지도 않았고, 용맹하지도 않았고, 주도하지도 못했다. 게임모델에서도 선진축구에 더 가까운 쪽은 홍 감독이 아닌 이정효 감독이었다. 결정적으로 홍 감독 선임 과정에서는 'MIK'에 얼마나 홍 감독 축구가 적합한지 재확인하는 절차가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기술철학은 향후 한국 축구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한 방향성을 담은 시금석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 이사와 홍 감독은 자신들이 그토록 관심있어하던 기술철학을 국내 감독 선임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외국인 감독보다 홍 감독이 기술철학에 더욱 부합했다는 여러 발언들이 공허한 울림으로 들리는 이유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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