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시시각각] 반도체 착시
‘반도체 시즌’이 돌아왔다. 인공지능(AI) 열풍이 메모리 반도체 특수를 촉발하면서 반도체 시장이 살아났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2분기 6조원대 영업이익(잠정)을 냈다.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해 D램 가격이 치솟으면서 역대급 호황이 펼쳐질 거란 기대까지 나온다. 코로나19 직후 시작된 2년간의 극심한 불황이 드디어 막을 내린 것이다.
반도체 부활은 한국 경제에도 희소식이다. 반도체는 수출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 경제에서 절대적 존재감을 갖고 있다. 올 상반기 231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엔 1년 전보다 52% 늘어난 반도체 수출(657억 달러)이 일등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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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는 호황, 민생 경기는 부진
삼성 노조 “생산 차질” 걸고 파업
여야 지원 좌초, 개혁 실기 안 돼
」
용산의 정책 사령탑인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교수 시절 인터뷰에서 “반도체 불황 때 한국 경제는 위기를 맞곤 했다”고 진단한 적이 있다(중앙SUNDAY 2022년 9월 24일자). 한국 경제 주력 산업이자 ‘캐시 카우(cash cow)’인 반도체에 탈이 나면 외환 수급 안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2022~2023년 상황이 그랬다. 반도체가 가라앉으면서 무역수지는 2022년 3월부터 15개월 연속 적자 행진을 했다. 나라 경제의 종합성적표로 여겨지는 경상수지 흑자가 급감했고, 원화가치는 급락했다.
성 실장의 진단은 바꿔 말하면 반도체가 좋으면 한국 경제도 괜찮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오랜 기간 그랬다. 한국 경제는 반도체라는 기관차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호황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무엇보다 경제의 해묵은 문제들을 가리는 ‘착시’를 초래했다. 가령 반도체를 뺀 대중 수출은 2021년 이미 적자로 돌아섰는데도 정부는 중국 시장에 구조적 이상이 생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중 수출 전략을 개편할 ‘골든 타임’을 놓친 것이다.
게다가 반도체가 이끄는 수출 호조 속에 민생 경기 침체는 간과되기 십상이다. 올 1~5월 소매판매는 1년 전보다 2.3% 감소해 15년 만에 최대 하락을 기록했다. 빚에 짓눌린 자영업자들, 실질임금이 오히려 줄어든 직장인들, 불완전 고용과 낮은 급여에 쪼들리는 청년층…. 다들 소비는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수출 반등에 힘입어 경기 회복으로 이어진다”(한덕수 국무총리, 6월 30일 고위 당정협의회) 같은 정부 인식에 민심이 돌아서는 것이다. 한 금융지주 회장에게 요즘 경기를 묻자 “일부 수출 대기업 말고 잘되는 게 없다. 내수, 특히 자영업이 큰일이다. 은행 연체율이 너무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국민은 한 총리보다 그의 말에 더 수긍할 것이다.
호황은 대개 위기의식과 상극이다. 호황의 축배에 취하면 안이해진다. 햇볕 좋은 날, 비 올 때를 대비하는 것이 철칙이나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을 때가 많다. 모처럼 여야 간에 반도체 산업 지원의 새 틀을 짜자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반도체 투자에 직접 보조금 지급, 전력·용수 같은 인프라 제공 등 여야의 구상은 미국·중국·일본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기업 지원에 한사코 반기를 드는 이들에겐 반도체 호황이 브레이크를 걸 명분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정부만 해도 재정 부담 등을 이유로 여야의 지원책에 소극적인 입장이다. 경쟁국이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붓는 현실에서 저리 대출 등 간접 지원으로 충분하다는 정부 인식엔 ‘반도체 수호’의 결연함이 보이지 않는다.
엊그제 삼성전자에서 창사 이래 첫 파업이 벌어졌다. 노조가 내건 “반도체 생산 차질”이란 목표가 섬뜩하기만 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갈라서라도 자신의 이득만 취하면 된다는 건가. 위기감과 공동체 의식으로 초일류를 이뤘던 시절엔 볼 수 없었던 소아적 발상이다.
돌이켜보면 나라 전체로도 반도체 호황에 취해 개혁을 실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정치가 경제는 뒷전인 채 볼썽사나운 정쟁에 올인하고 있다. 반가워야 할 반도체 호황이 그래서 자꾸 걱정스럽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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