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한동훈, 배신자인가 피해자인가

안혜리 2024. 7. 11. 00:2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건희 여사(왼쪽)가 총선을 앞우고 텔레그램 메시지를 통해 사과 의사를 밝혔으나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무시했다는 이른바 '읽씹 논란'이 전당대회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고 있다. 연합뉴스, 중앙포토

연임을 위해 얼마 전 물러났던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가 어제(10일) 모두가 예상했던 수순대로 당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먹사니즘(먹고사는 문제)'이 유일한 이데올로기"라며 민생을 출마 명분으로 내세웠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배임·뇌물, 위증교사 등 매우 위중한 각기 다른 4개 범죄 혐의로 재판 중인 본인을 구하기 위해 원내 1당인 공당을 방탄 삼은 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전 대표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유력 정치인들이 실제론 사익과 권력을 좇으면서 입으로만 국민·민생 타령하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참신한 메시지로 주목받는 정치 신인이라면 다르다. 속는 줄 알면서도 매번 기대를 걸게 된다. 국민의힘 당권 도전 중인 한동훈 후보가 그랬다.

「 국힘, 소모적 '읽씹 논란' 도배
총선 패배 반성 대신 궁중 암투
새 정치 약속 깬 한 후보 책임도

그는 지난해 말 법무부장관직을 내려놓고 여당 총선을 책임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맡으며 취임사에 이렇게 썼다. "정치인이 주고받는 말을 보면, 누가 이기는지가 전부인 게임과 정치가 다를 바 없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치는 ‘누가’ 못지않게 ‘왜' 이겨야 하는지가 본질이라는 점에서 그 둘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이겼을 때 이 나라가 어떻게 좋아지는지에 대한 명분과 희망이 없다면 정치는 정치인의 출세수단일 뿐이고, 주권자인 국민은 주인공이 아니라 입장료 내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된다. 정치인이나 진영의 이익보다 국민 이익이 먼저다. "

그리고 김건희 여사 사과를 둘러싸고 윤석열 대통령-한동훈 위원장 간 갈등의 핵심인물로 떠오른 김경율 회계사 등을 주축으로 한 비대위를 공식 출범하면서 "내부에서 궁중 암투 같은 사극 찍는 정치를 하지 말자, 사극은 어차피 늘 (사극 주연배우) 최수종의 것"이라고도 했다.

지난해 12월 26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한 한동훈 후보가 취임식에서 직접 쓴 수락의 변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그 후 6개월여가 흐른 지금, 유감스럽게도 국민은 한 후보 약속과는 정반대로 그가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 가운데 그 어떤 사극 속 사악한 궁중 암투보다 더한 음모와 음해,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를 매일 지겹도록 목격하고 있다.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를 뽑는 7·23 전당대회엔 상식이 통하는 제대로 된 보수정당을 바라는 일반 국민은 물론이요, 자기 당 당원에 대한 형식적인 배려조차 없으니 하는 말이다. 도통 '왜'에 대한 타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 네 후보가 당을 파국 위기에서 구할 그 어떤 비전이나 자신을 희생할 각오도 없이 오로지 본인의 당권(출세수단)만을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차라리 궁중에서 자기들끼리 암암리에 다투면 좋으련만 이 모든 과정이 거의 실시간으로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국민을 보고 싶지 않은 개싸움 구경꾼으로 내몰고 있다.

이렇게 싸잡아 비판하면 한 후보로선 많이 억울할 것이다. 본인은 암투의 주동자가 아니라 피해자일 뿐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당권 경쟁 초반엔 경쟁자들이 일제히 윤-한 갈등을 부풀려 전근대적인 '배신자 프레임'으로 한 후보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이젠 공작 냄새마저 풀풀 나는 6개월 전 김 여사의 텔레그램 문자 메시지를 '읽씹(읽고 답 안 함) 논란', 다시 말해 인성 논란과 정무적 판단 미숙으로 엮어 한 후보를 공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권력의 꿀을 빤 '꿀윤'들이 경쟁자를 떨어뜨리려고 피아식별 못 하는 것"(신지호 한 캠프 총괄상황실장)이라는 식의 '피해자 프레임'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후보가 당권 경쟁 레이스에 뛰어드는 순간 이런 소모적 갈등이 반복될 거라는 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그가 총선 패배 3개월 만에 무리해서 등판한 탓이다. 게다가 명분도 없었다. 전대를 앞두고 한 언론과의 연이은 인터뷰에서 그는 "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당의 변화에 내가 도움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당 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내가 가장 잘 안다"고 했다. 하지만 “거야(巨野) 폭주와 싸울 땐 몸을 사리더니 내부 공격할 때 권모술수가 난무한다”고 상대 비판에 목소리를 높였을 뿐 아무런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TV 토론 과정에선 문자와 관련 "공개하면 정부가 위험해진다"는 식으로 궁중 암투를 연상케 하는 발언도 했다.

안다. 지금 국민의힘 당권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의 가장 큰 원인은 잘못이 드러났을 때 사과하지 않고 비상식적으로 여론을 움직이려 한 김 여사, 이를 방치한 거로도 모자라 오히려 화를 키운 대통령, 그리고 이를 이용한 '친윤'에게 훨씬 많다는 걸. 그럼에도 그의 잘못된 등판으로 국민의힘이 개혁은커녕 파국을 향해 성큼성큼 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배신자도 피해자도 아닌, 궁중 암투의 한 축일 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