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의 사람사진] 다시 꺼낸 간호사 면허증

권혁재 2024. 7. 1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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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작가 최희정 날다…"우리는 모두 서로의 애인"


권혁재의 사람사진 / 최희정 작가

“내 아버지는 '사막 선인장'이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굵은 가시를 많이 달고
딱딱한 껍질로 뜨거운 태양 아래 묵묵히 서 있는 선인장.
나는 찔릴까 봐, 상처 입을까 봐 선뜻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선인장 뾰족한 가시들 사이로 피어 있는 붉은 꽃 몇 송이가 보인다.
어둠 밝히는 불빛으로 빛난다. 나는 그 불빛으로 살았다.”

이는 최희정 작가의 『오늘은 너의 애인이 되어 줄게』에 나오는 글이다.

최희정 작가의 대학교 2학년 가관식 사진이다. 아버지에 의해 마지 못해 갔던 길, 이젠 당신의 길이 되어 최희정이라는 이름 석 자로 서게 됐다. 사진 최희정 제공


그의 아버지는 딸의 대학입학원서에 간호학과를 써넣었다.
결국 대학입학원서를 아버지가 쓰고, 도장까지 찍은 터였다.
이로써 화가가, 천체학자가 되고팠던 그의 꿈은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그는 간호학과에 가고, 스물다섯에 대학병원 응급실 간호사가 됐다.
오래지 않아 허니문 베이비를 핑계로 병원을 그만두던 날 그는 다짐했다.
“죽어도 다시는 병원에 취직하는 일은 없을 거야!”

이후 딸과 아들을 키우며 살아온 20년, 그는 스스로 달팽이라고 했다.
책에서 그는 “달팽이가 되어 스스로 굴을 만들어 숨었고,
세상으로 나가는 입구를 막았던 적이 있었다.
내 눈물로 나를 절이던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서였을까”라고 고백했다.

이때, 그를 붙잡아준 사람들이 있었다.
여행을 가자며 손 끌어준 친구, 꽃을 꺾어주던 엄마, 밥을 차려주던 언니,
이 모두 그에겐 애인이었다.

위로와 사랑을 받기보다 거꾸로 주는 방법을 택했기에 최희정 작가는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애인’이 됐다. 이는 책 제목이『오늘은 너의 애인이 되어 줄게』인 이유다.


그렇게 그는 장롱 서랍을 열고 간호사 면허증을 꺼냈다. 쉰을 앞두고였다.
호스피스 병동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가 되었다.

그러고서는 자신이 쓴 글로 세상을, 사람을, 애인을 어루만지게 됐다.
요양병원 간호사로서, 작가로서 타인을 어루만지는 일,
결국 최희정이라는 이름 석 자로 달팽이 굴을 나서는 일이었다.

이십 년 넘게 '경단녀'로, 달팽이처럼 스스로 굴을 만들어 숨었던 삶. 지금의 최희정은 당신 이름 석 자로 취직하고, 세금 내고, 글을 쓰며 세상으로 나섰다. 세상의 애인이 되어....

어쩌면 그도 그의 아버지처럼 ‘사막 선인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굵은 가시를 달고 딱딱한 껍질로 섰던 최희정이란 선인장에 꽃이 폈으니…
이젠 최희정이 피운 꽃 빛으로 그 어떤 누구도 살 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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