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과 누비이불은 어떻게 미술작품 됐나
미술가 이슬기(52)는 어느 날 덕수궁 대한문에 걸려 있는 현판이 달리 보였다.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현판이다. ‘들고 나는 곳, 우리가 있는 곳, 그 문을 가르는 나만의 현판을 만들자’ 마음먹었다. 나무판 위에 ‘태초의 단어’, 의성어·의태어를 새겨보기로 했다. 사람만큼 큰 나무판에 중요한 이름을 새겼던 현판의 반전이다.
1992년부터 파리에서 사는 이 작가의 개인전 ‘삼삼’이 다음달 4일까지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지난달 말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한국어의 의성어는 매우 그래픽적이다. ‘쿵쿵’ ‘쾅쾅’ ‘꿍꿍’ 같은 단어는 모두 ‘삼삼한’ 장면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현판 장인과 협업, 가로 18m 홍송에 글자 ‘쿵쿵’을 새긴 작품 ‘쿵쿵’은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적인 요소와 일상의 사물·언어를 기하학적 패턴과 선명한 색채로 표현해온 그의 신작이다.
“갤러리에 구멍을 뚫어 빛을 가져와 보면 어떨까 상상했어요. 구멍을 뚫으면 ‘쿵’ 소리가 나겠죠. 그 소리를 담았습니다.”
전시에선 통영의 누비 장인과 협업한 ‘이불 프로젝트:U’도 선보인다. 1980년대까지 흔했던 현란한 색상의 누비 이불, 프랑스 친구들도 좋아하겠다 싶어 선물하려 찾아다녔지만 “그런 건 더는 팔지 않는다”는 얘기만 들었다.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2015년의 일이다.
“태어나고, 자고, 죽고, 사랑하고…. 이불 밑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잖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 물건에 속담이라는 공동체의 유산을 숨겨두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새하얀 진주 명주를 한 줄 한 줄 곱게 누빈 이불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거기 담긴 속담을 맞추는 재미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뼈대만 남기고 가는 단순미”를 추구하는 그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재밌어서”다. 새로운 걸 배우는 게 늘 재미있다는 이슬기는 “재미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슬기는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상 최종 수상자로 선정됐다. 오는 9월 프랑스 리옹 비엔날레에 참여한다.
이번 전시엔 ‘현판 프로젝트’와 ‘이불 프로젝트: U’를 비롯해 단청 장인과 협업해 만든 벽화 ‘모시단청’, 플랑드르 지방의 옛 장난감에서 착안한 ‘바가텔’ 등 30여 점이 나왔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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