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2강’ SK하이닉스·삼성, 불편한 속내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역학 구도가 고차방정식으로 변화할 조짐이다. HBM 세계 3위 미국 마이크론이 세계 곳곳에서 설비 투자 확대에 나서며 공세의 고삐를 죄고 있다. 향후 HBM 점유율 확대 계획도 구체적으로 내놔 이 시장 선두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정조준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자체 역량만으로 고군분투 중인 우리 기업과 달리, 마이크론은 기술 패권 탈환을 노리는 미국 정부의 노골적인 지원에 올라탔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갈수록 거세지는 HBM 설비 투자 속도전에서 후발 주자 공세를 막아내는 가운데, 과거와 차원이 다른 ‘초격차’를 벌려야 하는 엄혹한 상황에 직면했다. 국내 기업 양강 구도였던 HBM 시장이 3강 구도로 재편될지 세계 반도체업계 이목이 집중된다.
세계 곳곳에 생산기지 확충
닛케이아시아 등 외신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미국 아이다호에 차세대 HBM 연구개발(R&D)센터와 생산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말레이시아에도 현지 첫 HBM 생산공장 구축을 고려 중이다. 마이크론은 말레이시아 공장을 반도체 테스트와 패키징 등 후공정 기지로 운영했는데, 일부를 HBM 전용 라인으로 전환하겠단 것이다.
지금까지 마이크론 HBM 생산은 대부분 대만 타이중에서 이뤄졌다. 그랬던 마이크론이 세계 각지에 HBM 생산기지를 확충하겠다고 밝힌 것. 마이크론은 HBM 핵심 생산기지인 대만 타이중에서도 증설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2027년 가동을 목표로 짓고 있는 일본 히로시마 공장에서도 HBM용 D램을 집중 생산한다. 마이크론은 히로시마 신공장에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도입해 선단공정 D램을 양산하고 HBM 생산을 위한 D램도 만든다. 이를 두고 반도체업계에서는 수주형 산업인 HBM 속성에 비춰, 엔비디아 등 핵심 고객사로부터 일정 부분 물량 확보를 약속받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마이크론이 HBM은 고객사 맞춤형 제품인 만큼 설비 투자를 늘리겠다고 공언한 것은 고객이 약속한 물량이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며 “설비 투자에 많은 자금을 집행하는 확실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 짚었다.
올 들어 HBM 시장에서 마이크론 공세가 유독 거세다. 2024 회계연도 3분기(3~5월) 마이크론은 매출 68억1000만달러(약 9조5000억원)를 기록했다. 전년보다 82%, 전분기보다 17%가량 증가한 수준이다. 순이익은 3억3200만달러로, 매출과 주당순이익(0.62달러) 모두 월가 전망치(66억7000만달러·0.51달러)를 웃돌았다.
눈에 띄는 대목은 HBM 관련 매출 계획을 따로 발표했다는 점이다. 마이크론은 이번 분기 HBM3E(5세대 HBM) 매출이 1억달러 이상이라고 밝혔다. 마이크론은 HBM3(4세대)를 건너뛰고 지난 2월 세계 최초로 24GB(기가바이트) 8단 HBM3E 양산을 시작했다고 밝혀 주목받았다. 이 제품은 엔비디아 최신 GPU ‘H200’용으로 공급된다. 엔비디아의 HBM3E 품질 검증을 통과하고 유의미한 매출을 발생시킨 기업은 현재로선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유일하다. 삼성전자는 아직 엔비디아 HBM3E 품질 검증 테스트를 받고 있다.
마이크론은 향후 HBM 관련 구체적인 매출 계획도 내놨다. 마이크론은 “회계연도 2024년에는 HBM에서 수억달러, 2025년에는 수십억달러 매출을 일으킬 것”이라며 “당사 HBM은 2024년과 2025년까지 이미 매진됐다”고 밝혔다. 공언대로면 내년 말 HBM 시장에서 마이크론 점유율은 현재보다 3배가량 높은 24~26% 수준으로 ‘퀀텀 점프’한다. 현재 HBM 시장점유율은 SK하이닉스 53%, 삼성전자 35%, 마이크론 9% 수준이다.
美 정부 지원도 뒷배
마이크론의 ‘깜짝 도발’에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셈법은 복잡해졌다. 단기적으로는 SK하이닉스 1위, 삼성전자 2위 구도에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낮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다만, 마이크론 공세를 3위 사업자 ‘도발’ 수준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시각도 팽팽하다.
무엇보다 마이크론은 차세대 HBM 경쟁에서 저전력 부문 비교우위가 확고하다는 평가다. HBM은 세대가 올라갈수록 적층 경쟁이 심화한다. GPU와 HBM을 서로 좁게, 또 HBM을 높게 쌓는 과정에서 전력 소모가 커져 저전력 기술이 중요하다. 저전력 기술 구현 없이는 발열 문제는 고사하고 AI 데이터센터 비용 절감도 언감생심이다.
반도체업계에서는 최근 공개된 엔비디아 AI 슈퍼칩 ‘GB200’에 마이크론이 제작한 저전력 특화 D램이 쓰였다는 점을 예사롭지 않게 본다. GB200엔 AI 연산 기능을 담당하는 GPU 바로 옆에 HBM이 총 16개, CPU 옆에는 LPDDR5X가 16개 붙는다. 현존 최고 성능 D램 제품이 줄줄이 탑재된다. 특히 저전력 특화 D램 ‘LPDDR5X’가 장착된 점이 시선을 끈다. 마이크론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LPDDR5X는 애플 아이폰15 시리즈 등 모바일 기기에 사용되다가 이번에는 AI 가속기까지 침투했다. 마이크론이 애플에 이어 AI 절대강자 엔비디아까지 고성능 저전력 D램 공급에 성공한 것이다.
반도체 패권 회복에 나선 미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도 마이크론 뒷배다.
마이크론 설비 투자액 상당 부분이 미국 정부 반도체 보조금으로 충당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마이크론은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 Act)에 따라 61억달러(약 8조4100억원) 보조금을 받는다. 인텔·TSMC·삼성전자에 이어 네 번째 규모다. 마이크론이 올해 연간 시설 투자 계획을 기존 75억달러에서 최근 80억달러(약 11조원)로 상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 덕분으로 풀이된다.
첨단 반도체 산업은 설비 투자 사이클이 무한 반복된다는 점에서 개별 기업 역량만으로 재원을 마련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3㎚(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용 웨이퍼 한 장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은 1만1459달러다. 이 가운데 설비 관련 보조금 30%를 지급하면 최대 10% 원가 절감 효과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대표적인 설비 투자 관련 비용은 감가상각비다. 통상 영업비용(1만1459달러)의 46%(5271달러)를 차지한다. 보조금 지급으로 감가상각비의 30%가 줄면 3690달러가 되고, 그만큼 추가로 발생하는 법인세를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1164달러를 절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만1459달러의 10.2%다. 현재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은 반도체 설비 투자 촉진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지만 한국과 대만은 관련 제도가 없다.
HBM 설비 투자 압박 커
레거시 D램도 공급난 우려
이런 상황에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HBM 1위 SK하이닉스는 설비 투자 재원 마련이 난제다. HBM 등 AI 반도체 설비 투자와 R&D 경쟁이 갈수록 격화하지만 SK하이닉스 곳간 사정은 여의치 않다. 이익 레버리지 효과로 재무제표상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뛰어나지만 기업 여윳돈인 잉여현금흐름(FCF) 측면에선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금융투자업계 추산에 따르면, SK하이닉스가 SK그룹에 편입된 2012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거둔 회계상 순이익은 50조원에 육박한다. 반면, 이 기간 영업현금흐름에서 설비 투자(CAPEX) 비용과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 비용(약 70억달러·2021년) 지출 등을 제한 누적 잉여현금흐름은 약 3조원 중반대에 불과하다. 잉여현금흐름을 초과하는 배당금 지급과 M&A 등을 위해 SK하이닉스는 차입금을 좀처럼 줄이기 힘든 구조다. 그룹 편입 이후 10여년 동안 번 돈은 거의 다 공장 건설과 고가 장비 구입에 썼고 HBM 등 설비 투자를 위해 돈을 또 빌려야 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반도체업계에서 ‘레거시’ 범용 D램 공급 부족 조짐이 보여 SK하이닉스 입장에선 변수로 지목된다. AI 반도체용 메모리 HBM과 구분해 일반 메모리를 범용 메모리라 부른다. 최근 미국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는 보고서에서 “메모리 공급망이 HBM으로 빠르게 전환됨에 따라 일반 D램에 대한 투자 부족 현상이 나오고 있다”며 “2025년부터 스마트폰과 개인용 컴퓨터 AI 업그레이드 주기에 추가 메모리 용량이 필요하며, 그때까지 시장은 심각한 공급 부족을 보일 수 있다”고 봤다. 보고서는 D램의 경우 내년 수요가 공급보다 23% 더 많은 초과 수요 현상을 겪을 것으로 봤다. HBM 공급 부족 비율(11%)보다 범용 메모리 부족이 두드러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산업계에서도 HBM으로 설비 투자가 집중된 작금의 상황이 범용 D램 공급 부족을 부추길 것이라는 진단이 속속 나온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4분기로 갈수록 HBM 생산 비중이 계속 높아지면서 1a(4세대)와 1b(5세대) 설비 투자를 HBM용으로 할당해야 하는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며 “이는 곧, HBM 생산량 증가로 범용 D램에서 선단공정 적용 ‘쇼티지’가 심화할 것이라는 의미”라고 짚었다. 즉, 메모리 가격이 높아질수록, 반도체 업체는 메모리 가동률을 상향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만, HBM 때문에 1a·1b 같은 선단공정은 늘리고 싶어도 늘리기 힘든 구조라는 것이다.
이처럼 범용 D램과 HBM 사이 설비 투자 균형추가 팽팽한 상황에서는 현금흐름에서 우위에 있는 사업자가 상대적으로 전략 유연성이 높단 평가다. HBM 1위 SK하이닉스 입장에선 이 시장 선두 지위 유지를 위해 관련 설비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려야 하는 가운데, 범용 D램 수요 증가에도 대응해야 하는 이중고에 직면한다.
안정적 현금 창출이 가능한 여러 사업부를 둔 삼성전자와 달리, SK하이닉스는 메모리와 낸드 등 설비 투자 재원을 자체 동력으로 마련해야 한다. HBM 설비 투자 속도전에서 자칫 미세 ‘균열’이 생길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증권가를 중심으로 시간이 갈수록 HBM 경쟁에서 삼성전자가 우위를 확보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에, SK하이닉스는 2028년까지 향후 5년간 총 103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HBM 등 AI 관련 사업 분야에 약 80%(82조원)를 쏟아붓는다.
HBM 시장에서 자존심을 구긴 삼성전자는 올 하반기를 변곡점 삼겠다며 단단히 벼른다. 최근 산업계와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HBM3E 관련 매출 공백에도 불구하고 분기 조 단위 영업이익을 창출한 점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시선이 확산한다.
엔비디아 HBM3E 공급도 결국 시간문제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엔비디아 역시 안정적인 AI 칩 제조, 공급을 위해 HBM 공급망 다변화를 바란다는 게 반도체업계 진단이다. 삼성전자는 HBM3E 8단 양산에 이어 올 초 5세대 36GB 12단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HBM을 둘러싼 진짜 승부처는 6세대 HBM4가 될 전망이다. 6세대 HBM4는 설계부터 제조까지 기존 제품과는 차원이 다른 난도가 요구된다. 현재 AI 가속기는 엔비디아가 설계하고 TSMC가 후공정 패키징을 도맡는다.
6세대 HBM4부터는 공정 난도가 대폭 올라간다. 5세대 HBM3E는 1024개 입출력 단자(I/O)로 데이터를 전송한다. 6세대 HBM4에서는 단자 수가 이보다 2배 많은 2048개로 확대된다. 비슷한 크기 칩에 단자 수가 2배 늘어나므로 전력 소모를 줄여야 할 필요성이 커 더 미세공정이 요구된다.
삼성전자가 차세대 HBM에 승부를 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엔비디아 같은 칩 제조사는 파운드리와 패키징 등 전체 프로세스를 단일 업체에 맡기고 싶어 한다. 삼성전자는 종합반도체 기업으로 메모리와 파운드리 기술을 모두 확보하고 있다는 강점을 업고 ‘턴키 전략’으로 6세대 HBM4 수주전에 뛰어든다.
다만, 삼성 파운드리를 여전히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는 점은 걸림돌로 지목된다. 아직 삼성전자가 대형 고객사 위탁생산 물량을 수주한 사례가 외부에 알려진 적은 없다.
이에,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라이벌 TSMC와 손잡고 HBM4 개발에 나선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월 HBM3E 16단 칩 기술도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 2024 콘퍼런스에서 공개했다. 6세대 HBM4 양산도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겨 내년에 시작한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7호 (2024.07.03~2024.07.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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