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로빙화 | 동방미인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게으름뱅이 농부의 초대박 성공스토리
루빙화라 불러요.
아주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인데 꽃이 시들면
그걸 거름으로 쓴대요.
차를 기르는 농부들이
차밭에 루빙화를 심고
금방 시들고 나면
그 꽃을 그대로 땅에 묻으면
차를 잘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된다고 해요.
죽어서도 좋은 향기를
전해주는 것이죠.
1993년에 개봉한 대만 영화 ‘로빙화’는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면 위로 이런 자막이 흐르면서 시작한다.
‘차에 대한 영화?’ NO, NO~ 차밭이 중요한 배경과 소재로 활용되기는 한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1950~1960년대 배경 한국 영화에 쌀농사를 짓는 농부가 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삼는 대만 영화에서 차농사를 짓거나 차와 연관된 일을 하거나 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러운 단면이다.
‘로빙화’는 1950~1960년대 언저리쯤, 한국처럼 역시나 모두가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의 대만의 어느 시골이 배경이다. 주인공은 초등학교 4학년생 고아명과 아명의 누나 아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차밭 소작농인 아버지와 함께 산다.
아버지는 더운 땡볕에도 늘 차밭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살림살이는 필 줄 모르고 빚만 늘어간다. 어느 더운 날, 아버지는 아명과 아매에게 일주일 동안 학교 가지 말고 찻잎을 다 먹어치우는 차벌레를 잡으라고 한다. 엄마 대신 밥을 해서 동생을 먹이는 집안 살림꾼 아매는 군말 없이 “알겠다” 하지만, 말썽꾸러기 아명은 학교에 못 가고 차벌레를 잡아야 하는 일상이 너무 싫다. 학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게 아니고, 미술반에 가고 싶어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또 잘 그리는 아명은 미술반에서 그림 연습을 해 전국대회에 나가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 그러나 “차벌레를 못 잡으면 굶어 죽을 줄 알라”는 아버지 호통에 툴툴대며 차벌레를 잡는다.
“왜 파란 해를 그렸냐?”는 선생님 질문에 “빨간 해 때문에 아버지가 쓰러져서(땡볕에 차밭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지쳐 쓰러진 사건이 있었다) 아버지 힘들지 않게(덥지 않게) 파란 해가 떴으면 좋겠다”고 답하는 식이다.
‘대만’과 ‘차벌레’ 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가 있으실지? 바로 단어 하나 떠올릴 수 있다면 차 쫌~ 아시는 분이다.
대만을 대표하는 차 ‘동방미인’이다. 대만은 나라 모양이 마치 ‘찻잎’처럼 생겼다. ‘차의 왕국’으로 불릴 만한 포스다. 찻잎 맨 위쪽 가운데 즈음에 수도 ‘타이베이’가 위치하고 타이베이에서 살짝 남서쪽에 ‘신주’라는 도시가 자리한다. 우리 말로 ‘신죽’으로 불리는 곳. 이 곳이 바로 대만차의 대표주자 ‘동방미인’의 고향이다.
“빨간해 때문에 아버지가 쓰러져서”
대만 신주 지역에서 차농사를 짓던 한 농부가 게으름을 피우다 차밭에 농약 뿌리는 시기를 놓쳤다. 어느 날 밭에 나가 보니, 차밭에 웬 연두색 벌레가 잔뜩 끼어 찻잎을 갉아먹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기저기 벌레 먹힌 찻잎으로 차를 만들 수는 없는 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찻잎에서 뭔가 좋은 향이 났다. 1년 농사를 망치게 생긴 농부는 한숨을 쉬다 일단 그 찻잎으로 차를 만들었다. 꽤 좋은 향과 맛이 났지만 벌레 먹은 찻잎으로 만든 차를 팔 자신이 도무지 없었던 농부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는 먼 곳에 차를 팔러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차향이 너무 좋다는 평을 들으면서 평소 그가 팔던 차 가격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차가 모두 팔려나갔다. 함박 웃음꽃을 피우며 돌아온 농부가 이 얘기를 하자 모두들 비웃었다. “허풍이 세다”며 심지어 그 차를 ‘허풍차’라 불렀다. 동방미인의 맨 처음 이름이 ‘팽풍차(팽풍은 허풍이라는 뜻)’였던 이유다. 그런데 몇 달 뒤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그 향기 좋은 차를 다시 만들어주면 만들어주는 만큼 다 비싼 값에 사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차농들이 앞다퉈 동방미인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스토리가 전해 내려온다.
향이 화려해 ‘우롱차의 샴페인’이라고도 불리는 동방미인은 ‘천상의 향’으로 유명하다. 보통 차를 우릴 때 찻잎을 꺼내 건차(乾茶)향을 맡고 차를 우려낸 후 찻잔에 따른 차의 향을 맡고 그다음 우려내고 남은 찻잎의 향을 맡는다.
동방미인 차향을 맡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향이 아름답다고? 일단 맡아보시길. 와인을 즐기고 ‘노즈(와인향)’를 즐기는 분들은 바로 이해가 되실 터. 향이 ‘진짜로’ 아름답다. “이래서 ‘동방미인’이라는 이름이 붙었구나!!!” 설명이 필요 없다.
이렇게 찻잎이 향을 뿜뿜~ 뿜어내는 시기의 찻잎을 따서 만든 차가 ‘동방미인’이다. 그런데 찻잎에 향을 뿜어내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 6월 중 불과 며칠뿐. 그때를 놓치면 차를 만들 수 없다. 그뿐인가. 6월은 한국도 덥지만, 홍콩 바로 옆에 위치한 대만에서는 그야말로 찜통 더위가 판치는 시기다. 숨만 쉬어도 더운 날씨인 만큼, 찻잎을 딸 수 있는 시간도 아주 이른 새벽이나 잠깐 가능하다. 한 일주일여 기간 동안, 그것도 해가 막 떠오르기 전에 찻잎을 따서 만들어야 하니, 차 양이 많지 않고 귀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출품된 차 中 2~2.5% 두등장 등급 얻어
향도 뛰어나고 양도 적다.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7월 초까지 여기저기서 만들어진 동방미인은 7월 말~8월 초 쯤 ‘비새’에서 품질을 겨룬다. ‘비새’는 ‘시합’이란 뜻. 대만에서는 매년 2번(여름, 겨울) 지역 농회(우리나라로 치면 농협 정도)가 ‘비새’를 연다. 비새 때마다 수천 종의 차가 출품되는데 그중 2~2.5%가 최고 등급인 ‘두등장’에 선정된다. 신주 농회가 주최하는 비새에서 두등장이 되면 75g 가격이 30만~40만원대로 올라간다.
동방미인은 사실 ‘게으름뱅이 농부의 예상치 못한 초대박 성공 스토리’다. 보이차의 고장 윈난성에도 이런 이야기가 비일비재하다.
노반장, 노만아, 괄풍채, 박하당 등등. 보이차는 지역별로 차 가격이 다르다.
부르고뉴 와인 로마네꽁티가 태생적으로 비싼 것처럼 노반장, 노만아차도 태생적으로 비싸다. 원래부터 비싼 건 아니었다. 이들 지역 차가 비싸진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
1900년대 후반, 첩첩산중 두메산골에서 밥 굶는 이가 많은 이들 지역에 지방정부 관리들이 찾아와 “차나무를 다 베어내고 그 자리에 옥수수를 심으면 굶지는 않을 것”이라며 옥수수 심기를 독려했다고. 부지런하고 말 잘 듣는 이들은 정부 지침대로 차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옥수수를 심었다. 좀 게으르거나 좀 삐딱하거나 하여튼 그런 이들은 정부 말을 듣지 않고 그냥 세월아 네월아 가끔 먹고 가끔 굶고 그러면서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이들 지역 차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차나무를 그대로 갖고 있던 차농들은 일거에 부농이 됐다.
코로나 발생 직전인 2019년 12월, 노반장 마을을 찾았을 때, 마중 나온 노반장 5호(100여개 가구가 1호부터 쭉 번호가 매겨져 있다) 양하이룽은 포르쉐를 끌고 나왔다. 집사람이 모는 벤츠 포함 보유한 차만 7대라는 룽. 연간 800㎏ 정도의 차를 생산한다는 양하이룽은 “찻잎 팔아 1년에 20억원 넘는 수입을 올린다”고 들려줬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 게 아니고 ‘일찍 일어나는 새가 그냥 피곤하기만 할 수도 있다는’ 뭐~ 그런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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