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예년과 같을 거란 착각은 접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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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상 기자]
가뜩이나 게으른 놈, 눈치 안 보고 놀기 좋은 날씨려니 했다. 소파에 드러누워 영화 한 편을 보아도 좋고, 점찍어 둔 책 한 권을 설렁설렁 넘기기에도 좋았다. 비에 어울리는 음악은 손꼽을 필요도 없었다. 빗소리도 음악이니까.
빗속에도 새들이 날아들었다. 까치는 잔디밭을 종종거리며 연신 쪼아대고 까마귀는 전신주에 앉아 먼 데를 바라본다. 나비도 벌도 꽃잎 속을 후빈다. 어지간한 비로는 이들의 비행을 막을 수 없다. 먹고사는 일이다.
며칠간 계속된 비에 마당의 풀꽃들이 퉁퉁 불어 터질 것만 같다. 모자라면 줄 수 있지만 스며든 물은 빼낼 방법이 없다. 물도 너무 많이 마시면 죽는다. 지나침은 생명수를 사약으로 만들기도 한다. 장마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 잘 이겨내길 바랄 밖에.
작년에 한 번 겪어본 장마다. 새처럼 잘 찾아 먹고 풀꽃처럼 잘 견뎌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장마 준비도 나름 한다고 했다. 배수구를 손보고 텃밭 작물 지주대를 고쳐 맸다.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곰팡이에 대비해 제습제를 집안 곳곳에 장기알처럼 깔아 두었다.
늦은 저녁, 빗줄기가 굵어지니 비 새는 곳이 있다. 차양과 벽난로 연통 아래 빗물받이를 갖다 댄다. 꿉꿉한 습기가 집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흥, 이정도야 어렵지 않지' 작년엔 한 달 내내 비에 절었었다. 그래서 쉽게 생각했다. 일기예보를 다시 보기 전까지는.
몇 가지 잊은 게 있었다. 이제 날씨는 예년과 다르다는 것, 예보는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선이 출몰했음을 알았을 땐 이미 늦다는 것 말이다. 밤이 되자 갑자기 하늘에서 물을 퍼붓는다. 물받이에 낙수가 분침에서 초침으로 바뀌었다.
차양은 햇볕 대신 그악스러운 빗발을 흠씬 두들겨 맞고 있다. 퍼붓는 빗소리에 온몸이 흠뻑 젖은 느낌이다.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듯, 이 세상을 끝장내겠다고 내리는 비다. 뒤란 계곡에선 연신 그르렁대며 옹벽을 할퀴는 소리가 들린다. 가로등 비친 마당의 빗물은 비늘처럼 흐른다.
▲ 폭우에 유실된 축대, 쓰러진 지주대, 꼿꼿한 백합 |
ⓒ 김은상 |
물러진 땅 때문에 텃밭 지주대가 쓰러지고 옥수수 몇 대가 누워 있다. 계곡 건너 축대와 도로가 무너져 있고, 굽이치는 물길 속에서 굴러 내린 바윗돌은 철계단에 처박혀 있다. '이게 물폭탄이구나!' 끄응하고 신음이 새어 나온다.
휴대전화엔 하릴없는 호우, 산사태, 홍수, 침수 경보가 더께처럼 쌓였다. 비가 그치니 TV에선 피해 속보, 날씨 특보가 속속 나온다. 우리 동네 강우량은 시간당 60mm, '양동이로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인근 지역엔 시간당 100mm가 훨씬 넘는 물폭격을 받았으니 오죽할까?
행정안전부는 호우 위기경보 수준을 '주의'에서 '경계' 단계로 상향하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1단계에서 2단계로 격상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지켜주겠다는 것인지, 지켜보고 있겠다는 것인지. 어쨌든 폭우가 지나가니 격이 올라갔다는 소식이다.
세상을 벌할 것처럼 내리던 비가 그쳤다. 사라진 것인지, 자리를 옮긴 것인지. 이것이 마지막인지, 이제부터 시작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제 몸 하나 지키기도 어려워져 마음이 고단하다. 놀랍게도 백합은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우뚝하다. 긴 장마에 모두 백합 같은 운이 따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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