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의 '인천-하와이' 일정, 노림수 있었나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7. 1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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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윤 대통령 일정에 어른 거리는 이승만 그림자

[김종성 기자]

▲ 하와이 주지사와 대화하는 윤석열-김건희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8일(현지시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75주년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미국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에 도착해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서 내린 뒤 영접을 나온 조시 그린 하와이 주지사 부부와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한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 시각 9일 하와이에서 채상병 특검법에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날 그는 하와이 동포들을 만난 자리에서 영화 <건국전쟁> 대사와 비슷한 발언도 했다.

동포 간담회 때 그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께서 인재 양성과 독립운동에 매진하시면서 국가 건국의 기반을 마련하신 것도 바로 이곳입니다"라고 말했다.

<건국전쟁>은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의 미국 활동을 소개한 뒤 "그게 3·1운동으로 무르익었다"라는 어이없는 평가를 내놓는다. 이 영화는 "3·1운동의 배경을 보면 이런 국제정세를 파악한 이승만의 앞을 내다보고 미국의 정치인들의 심중을 알고 국제정세를 파악했던 이승만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승만의 활동이 3·1운동의 배경이 됐다는 영화 대사는 이승만이 3·1운동 나흘 전에 했던 일과 배치된다. 1919년 2월 25일 그는 승전국인 영국·프랑스·일본 등이 주도하는 국제연맹이 한국을 통치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그로부터 4일 뒤에 한국인들이 외친 구호가 "위임통치 만세"가 아닌 "대한독립 만세", "일본 나가라" 등이었던 점은 이승만이 3·1운동 정신과 배치되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함으로써 대한민국이 3·1운동의 토대 위에서 건국됐음을 천명했다. 이승만은 3·1운동과 배치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3·1운동의 토대 위에서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과도 배치되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이 이를 무시한 채 <건국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을 하와이에서 했던 것이다.

윤 대통령의 하와이 발언은 출국 나흘 전에 있었던 한국자유총연맹 기념식 발언과 맥이 닿는다. 지난 4일 자유총연맹 70주년 행사에서 그는 "광복 이후 격변과 혼란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이 땅에 자유의 가치를 심고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하셨습니다"라고 발언했다.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임시정부가 건립됐고 이 정부가 대한민국정부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기초가 반일 독립운동에 있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승만이 1945년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것은 이 같은 헌법 전문을 무시하는 극우세력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윤 대통령이 또다시 되풀이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인천에서는 '이승만이 광복 이후에 건국했다'고 발언하고,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이 광복 이전에 건국을 준비했다'고 발언했다. 이승만을 앞세워 '1948년 건국'을 못 박으려는 극우세력에 동조하는 주장들이 대통령에 의해 입체적으로 조합된 것이다.

윤 대통령이 나토 정상회의 참석 직전에 자유총연맹 기념식에 참석한 것도 이승만과 연결된다. 70년 전인 1954년에 이승만이 자유총연맹의 전신인 아시아반공연맹을 만들고 2년 뒤 한국아시아반공연맹을 출범시킨 것은 나토와 니토(NEATO, 동북아조약기구)를 연결하려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나토가 창설(1949.4.4)된 지 8년 뒤에 나온 1957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 1면 중간은 미 국무부의 세계전략을 소개하면서 "지난 10년간 여러 번 논의된 바 있는 하나의 계획은 동북아세아조약기구 설치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니토라는 이름의 동맹체는 창설되지 못했다. 이것이 미국의 동맹이 된 일본의 재무장을 부추길 수 있다는 이 지역의 우려 때문이었다. 그 대신에 창설된 것이 친미국가들로 형성된 아시아반공연맹이다. 이승만은 일본을 배제하고 중화민국·필리핀·태국·베트남·오키나와·홍콩·마카오를 포함시켜 이 조직을 구축했다.

일본을 끼워넣는 미국의 구상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지만, 반공 국가들을 결집시키는 이 기구의 창설은 미국의 세계전략에 어필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요구에 대한 이승만식 반응이었다.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1층에 '이승만 하야'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때 연설 장면이다.
ⓒ 윤성효
 
윤 대통령은 인천에서도 이승만을 언급하고, 하와이에서도 이승만을 언급했다. 두 곳에서 이승만의 건국 혹은 건국 준비를 거론했다. 이런 발언을 매개로 인천과 하와이를 연결하는 것은 이승만의 망명 과정을 연상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24세 때인 1899년 1월 9일 고종황제 폐위 음모 혐의로 수감된 이승만은 21일 뒤 탈옥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가 감옥을 나온 것은 러일전쟁 중인 1904년 8월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의 도움으로 특별사면을 받은 결과다.

그해 11월, 그는 인천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승만 사망 9일 뒤에 발행된 1965년 7월 28일자 <경향신문> 6면 특집은 "이승만이 인천항을 떠난 것은 광무 8년 11월 4일이었다"고 한 뒤 "비좁은 선실에 누워 잠을 청하니 만감이 교차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이승만의 심경을 들려준다. 그런 다음, "동경을 떠나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29일. 인천을 떠난 지 꼭 25일만이었다"고 말한다.

인천에서 도쿄를 거쳐 하와이로 가는 이 여정은 이승만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는 그가 한국이 아닌 미국을 활동 무대로 삼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 자신도 이 순간을 소중하게 기억했다는 점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부터 인하공과대학(인하대의 전신) 설립을 추진한 데서도 나타난다. 윤 대통령은 이번 하와이 동포 간담회 때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따서 인하대학교가 설립됐습니다"라며 인천과 하와이를 연걸했다.

인천에서 하와이로 이어지는 윤 대통령의 이번 행보는 미국으로 망명하는 청년 이승만의 모습과 미국의 나토 동진에 편승하는 노년 이승만의 모습을 함께 연상시킬 만한 소재다. 동시에, 극우세력이 호응하는 건국절 논쟁을 부각시키려는 윤 정권의 의중과도 연결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이벤트가 하필이면 채상병 특검법 거부와 맞물려 진행됐다. 이승만 정권은 청년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켜 한국전쟁에 투입한 뒤 그중 수만 명이 굶어죽거나 동사하는 상황을 방치했다(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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