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모자라 부동산까지 갖다바친 '연애중독' 남자의 최후

이준목 2024. 7. 1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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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루이 15세(Louis XV)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제4대 국왕이자, 태양왕으로 유명한 루이 14세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영리하고 온화한 성품에 준수한 외모, 예술적 소양까지 두루 갖춘 '엄친아' 출신이었지만, 오늘날 루이 15세라는 이름은 무능한 통치와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유럽의 강대국이던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몰락시킨 암군으로 더 유명하다.

그런데 루이 15세의 치세에 프랑스의 역사를 주도한 진정한 주인공이자 '흑막'은, 어쩌면 왕의 권력 뒤에 숨어서 온갖 스캔들과 국정농단을 주도했던 '왕의 여인들'이었다.

지난 9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59회에서는 '프랑스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루이 15세의 여자들' 편을 주제로 프랑스 역사를 뒤흔든 은밀하고도 복잡한 왕실의 숨겨진 이야기를 조명했다. 임승휘 선문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루이 15세는 1710년 2월 15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였다. 당시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Maison de Bourbon)의 전성기로 증조부인 루이 14세는 스스로를 태양왕(Le Roi Soleil)이라고 자칭할 만큼 막강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루이 14세는 무려 72년이나 장기집권하며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군주라는 기록도 세웠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치세 말년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전염병의 창궐로 아들과 손자가 줄줄이 사망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결국 증손자인 루이 15세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1715년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루이 15세는 불과 5세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된다. 새 국왕의 나이가 어렸기에 루이 14세의 조카인 오를레앙 공작이 섭정을 맡았고, 루이 15세는 13살이 돼서야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루이 15세 통치의 시작
 
 tvN <벌거벗은 세계사> 화면 갈무리
ⓒ tvN
 
어린 새 국왕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기대와 지지는 매우 높았다. 여기에는 루이 15세의 특출한 외모 역시 한몫을 담당했다. 기록에선 '왕은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랭스에서 열린 대관식 아침에 그가 입은 긴 옷과 은색모자는 사랑의 신 에로스를 연상시키게 했다'면서 루이 15세의 외모를 극찬하고 있다.

또다른 일화도 있다. 러시아 황제인 표트르 대제가 당시 7살으로 국왕이 된 상태였던 루이 15세를 처음 만났는데, 그 귀여운 외모에 홀딱 반해 외교적 결례조차 잊고 번쩍 안아들어서 얼굴에 뽀뽀를 했다는 이야기다.

루이 15세가 집권할 당시 프랑스는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이미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증조부인 선왕 루이 14세는 무리한 대외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국가 부채를 남겨놓았다.

다행히 수석대신이었던 플뢰리 추기경이 루이 15세 대신 정권을 맡아 프랑스의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집중했고 적자이던 국가재정을 흑자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유능한 신하들이 국정을 잘 운영하면서 초기의 루이 15세는 직접 통치를 하지 않고도 프랑스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왕(Le Bien Aime)'이라는 칭송을 받을수 있었다.

15세가 된 루이 15세는 폴란드의 왕녀였던 8살 연상의 마리아 레슈친스카를 왕비로 맞아들인다. 당시 프랑스 왕실에선 어린 루이 15세가 급사라도 한다면 부르봉 직계가 끊긴다는 위기감에 고조됐고, 빨리 후손을 낳는 것이 시급한 국가적 현안이었다. 왕위에서 쫓겨나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몰락한 왕가의 후예인 마리아가 뜬금없이 왕비로 낙점된 것은, 폴란드 왕실이 대대로 자손이 많아서 다산의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마리아는 루이 15세와의 정략결혼 이후 12년 간 무려 10명의 자녀를 낳으며 프랑스가 기대했던 '다산의 여왕'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마리아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의 임신에 부담을 느끼고 루이 15세와의 부부관계를 거절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루이 15세는 안정된 국정운영과 연이은 자녀 출산 등으로 더 이상 군주로서 이뤄야 할 목표가 사라지면서 점차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여성펀력의 시작이었다.

부인 처제들과 불륜... 여성편력이 불러온 막장 드라마

루이 15세는 프랑스의 귀족가문으로 당시 왕비 마리아의 측근이였던 루이즈 줄리 드 마이넬이라는 여성과 밀회를 즐겼다. 심지어 루이 15세는 유부녀였던 루이즈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아예 자신의 공식 정부(후궁)로 삼았다.

루이즈에게도 만족하지 못한 루이 15세는 다른 여성들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륜의 대상은, 심지어 처제가 되는 루이즈의 친자매들이었다.

루이 15세는 먼저 루이즈의 동생인 둘째 폴린 펠리시테와 사랑에 빠졌다. 1741년 폴린이 루이 15세의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자, 이번엔 셋째 디안 애들라이트-다섯째 마리안느와 잇달아 염문을 뿌리며 세기의 '처제 킬러'로 등극한다.

일설에는 다섯 자매 중 넷째인 오르탕스 역시 루이 15세와 몇 차례 관계를 맺었지만 자매들과 달리 깊은 사이로는 발전하지 못했다는 소문도 있다. 이에 당시 프랑스에서는 친자매들만 골라서 번갈아가며 탐하는 루이 15세의 난잡한 사생활을 비꼬는 풍자시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프랑스인들은 왕실의 추문에 큰 충격과 실망감을 느꼈다. '아르장송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의 시민들은 폴린이 사망하자 오히려 기뻐했으며, 궁정 밖으로 옮겨지던 폴린의 시신을 발견하자 불쏘시개를 던지며 야유하는등 모욕을 가했다고 한다. 이는 곧 루이 15세를 향한 비판이기도 했다.

이어 막내 마리안느는 루이 15세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언니 루이즈를 몰아내고 자신을 공식 정부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루이 15세는 이를 수락했고 루이즈는 결국 친동생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며 막장드라마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루이 15세가 방탕한 사생활에 빠져서 국정에는 무관심할 동안, 유럽의 국제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면서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이 모두 참전하는 국제전으로 번진다. 당시 명신이던 플뢰리 추기경이 사망하면서 친정체제를 선언한 루이 15세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을 선언한다.

그런데 루이 15세는 전쟁터에 정부인 마리안느와 디안 자매를 함께 동행시키는 기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설상가상 루이 15세는 전쟁터에서 갑자기 병에 걸려 목숨이 위독한 지경에 놓인다.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루이 15세가 병이 걸린 것이 방탕한 사생활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궁지에 몰린 루이 15세는 결국 그 자리에서 마이넬 자매들을 추방하고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왕실의 권위는 땅바닥까지 떨어진 뒤였다.

8년에 걸친 오스트리아 왕위전쟁은 사실상 무승부로 끝났지만, 정작 프랑스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막대한 재정적 부담만 안게 됐다. 플뢰리가 간신히 회복시켰던 프랑스의 국가재정은 루이 15세의 악수로 인해 또다시 16조 원에 이르는 적자를 떠안게 됐다.

퐁파두르 부인의 등장
 
 tvN <벌거벗은 세계사> 화면 갈무리
ⓒ tvN
 
정작 루이 15세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 마이넬 자매가 사라진 이후 루이 15세의 새로운 여인으로 나타난 것은 '퐁파두르 부인'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으로 평민 출신이었지만, 남다른 미모와 뛰어난 예술적 소양을 갖춘 여성으로 루이 15세의 눈을 사로잡게 된다.

1745년 퐁파두르는 한 가면무도회에서 루이 15세를 처음 만났다. 퐁파두르는 의도적으로 사냥의 여신 다애애나의 복장을 하고 나타나 미모를 과시했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루이 15세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루이 15세는 평민 출신이라 정부가 될 수 없었던 퐁파두르를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귀족 작위를 매입하는 것으로 신분세탁까지 해줬다. 이때부터 귀족 신분이자 루이 15세의 공식정부가 된 그녀는 훗날 우리에게 익숙한 '퐁파두르 후작 부인(Madame de Pompadour)'으로 불리게 된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항상 외모 치장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사교계에서는 퐁파두르의 패션 스타일이 큰 유행을 일으키게 된다. 오늘까지 퐁파두르의 패션은 '폼폼 스타일'로 불리우며 현대의 대중문화에도 꾸준히 변주되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퐁파두르의 영향은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18세기 들어 웅장한 바로크 양식이 쇠퇴하고, 더 화려하면서 자유롭고 섬세한 로코코 양식(Rococo)이 유행하는 계기가 된다. 퐁파두르가 자신의 인맥을 넓히고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 시작된 사교모임인 살롱(Saloon) 문화가 한층 발전하게 된다.

또한 퐁파두르는 수많은 지식인-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앞장섰고, 당시 유럽에서 불고 있던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백과사전의 편찬, 훗날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는 모차르트를 유년 시절에 후원했던 기록 등도 남아있다.

루이 15세는 사랑하는 퐁파두르를 위해 돈을 물쓰듯 하며 호화로운 성과 저택을 아낌없이 선물해줬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후원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토지를 매입하며 재산을 더욱 불리기도 했다. 두 사람은 여러 성을 오가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런데 퐁파두르가 31세가 되며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더 이상 루이 15세와 잠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됐다. 이에 퐁파두르는 왕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사슴 정원'을 만들어 13-14세의 갓 성인이 된 어린 소녀들을 데려다가 루이 15세에게 직접 바쳤다.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곤궁한 하층민 출신의 소녀들이었다. 퐁파두르는 돈으로 소녀들을 사들여서 교육을 시켰고,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더라도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했다. 또한 사슴 정원은 오직 루이 15세의 즐거움을 위해 사치스러운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느라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기도 했다.

또한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국정에도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다. 점차 권력이 커진 퐁파두르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측근들을 중용하면서 온갖 국정농단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향락에 빠진 루이 15세는 국정에 무관심했고 퐁파두르의 행보를 사실상 방관했다. 퐁파두르의 심복들이 나라의 요직을 장악하고,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에 퐁파두르에게 먼저 내용이 보고될 정도였다고 한다. 퐁파두르가 이렇게까지 온갖 현안에 무리하게 개입한 것도, 어떻게든 루이 15세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각인시켜서 본인의 지위를 지키려는 몸부림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너진 절대왕정

1756년, 퐁파두르에게 몰락의 시작이 된 '7년 전쟁'(Seven Years' War)이 발발한다. 프랑스는 외교라인을 장악한 퐁파두르의 주도로 왕위계승전쟁 때와 달리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지만, 이 선택은 대실패로 끝났다. 1762년 평화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프랑스는 아무런 소득없이 다시 한번 엄청난 재정악화에 이어 해외 식민지까지 대거 상실하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에 무능한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을 향한 프랑스의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1757년에는 불발로 끝났지만 파리에서 루이 15세를 향한 암살시도가 일어나 프랑스를 충격에 빠드리기도 했다.

퐁파두르는 7년전쟁의 실패와 날카로운 민심에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건강이 쇠약해져갔고, 1764년 4월 42세의 나이로 끝내 세상을 떠난다. 루이 15세는 19년간 함께했던 오랜 연인이자 정치적 동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다수의 프랑스인들은 그녀를 저주했다고 한다.

퐁파두르가 사망한 후에도 루이 15세의 여성편력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덧 58세로 환갑이 다 된 루이 15세는 당시 20대로 매춘부 출신의 잔 뒤바리를 마지막 정부로 맞아들이게 된다.

루이 15세의 딸들보다도 나이가 어린데다 비천한 경력의 잔 뒤 바리를 둘러싸고 프랑스 왕실은 심각한 불화를 겪으며 결속력이 무너진다. 루이 15세의 며느리이자 훗날 프랑스의 왕비가 되는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의 왕비) 역시 시어머니격인 잔 뒤 바리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대놓고 무시하면서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 일화도 유명하다.

잔 뒤 바리 역시 사치와 낭비로 악명이 높았다. 루이 15세는 잔 뒤바리에게 정부로서의 지원금은 물론, 보석과 의상을 마구 선물하며 재정을 낭비했다. 그녀가 루이 15세의 정부로 있던 불과 6년간 사용한 금액만, 한화로 환산하면 무려 2132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1760년대들어 가뜩이나 심각한 기근으로 민생이 피폐해졌던 프랑스인들의 여론은 더욱 악화된다. 이에 프랑스인들은 앙리 4세-루이 14세의 시대와 비교해 '지금 우리에게는 왕이 없다'고 비판하는 등 아직 절대왕정의 시대였음에도 대놓고 군주를 비난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기 시작한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화면 갈무리
ⓒ tvN
 
1774년 루이 15세는 천연두를 앓다가 6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죽기 직전까지도 정신을 못차린 루이 15세는 잔 뒤 바리에게 선물하기 위해 총 2800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소요된 고급 목걸이를 제작하려 했으나 완성되는 것은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루이 15세 사후 목걸이의 존재가 뒤늦게 알려지면서, 굶주림에 고통받던 백성들을 중심으로 무능력하고 사치만 일삼는 왕실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가 된다.

15년 뒤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당시 국왕이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잔 뒤 바리까지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어찌보면 선대의 사치와 무능으로 인한 업보까지 후대가 억울하게 뒤집어쓴 측면도 없지않았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을 지배하던 절대왕정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전환점의 시작이 된다.

절대왕정의 몰락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사건의 과정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의 실수와 패착이 있었고, 그게 쌓이고 쌓여서 끝내는 거대한 체제가 무너지는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역사는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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