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과 누비이불은 어떻게 현대미술이 됐나…이슬기의 ‘미술인류학’

권근영 2024. 7. 1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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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 8월 4일까지, 이슬기 개인전 ‘삼삼’
이슬기의 신작 '현판프로젝트'. 홍송(140x180x4 ㎝)에 단청 작업했다. 사진 갤러리현대


[문제1] 위 현판에 새겨진 글씨를 읽어 보시오.
1992년부터 파리에서 사는 미술가 이슬기(52)는 덕수궁 대한문에 걸린 현판이 달리 보였다.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현판이다. ‘들고 나는 곳, 우리가 있는 곳, 그 문을 가르는 나만의 현판을 만들자’ 마음먹었다. 나무판 위에 ‘태초의 단어’, 의성어ㆍ의태어를 새겨보기로 했다. 사람만큼 큰 나무판에 중요한 이름을 새겼던 현판의 반전이다. 지난달 말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작가는 “한국어의 의성어는 매우 그래픽적이다. ‘쿵쿵’‘쾅쾅’‘꿍꿍’ 같은 단어는 모두 ‘삼삼한’ 장면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쿤다리 거미Ⅱ'와 '바텔'(벽에 걸린 두 작품)이 있는 전시장. 격자무늬 벽화는 단청 장인과 협업한 '모시 단청'. 사진 갤러리현대

‘사물이나 사람의 생김새나 됨됨이가 마음이 끌리게 그럴듯하다’‘잊히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듯 또렷하다’‘음식 맛이 조금 싱거운 듯하면서 맛이 있다’ 등 ‘삼삼하다’는 다양한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인 듯 깔끔한 마무리를 자랑하지만 다가가면 다채로운 의미를 띤 이슬기의 작품들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삼삼’, 이번 개인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현판 프로젝트 스르륵'을 설명하고 있는 이슬기. 나무판에 새겨진 '스스륵' 글자가 흐르는 듯하다. 권근영 기자


현판 장인과 협업, 가로 18m 홍송에 새긴 글자는 ‘쿵쿵’. 위 [문제1]의 답이다. "갤러리에 구멍을 뚫어 빛을 가져와 보면 어떨까 상상했어요. 구멍을 뚫으면 ‘쿵’ 소리가 나겠죠. 그 소리를 담았습니다." 독창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적인 요소와 일상의 사물, 언어를 기하학적 패턴과 선명한 색채로 표현한 조각과 설치 작업을 선보여 온 이슬기의 신작이다. 그렇다면 또 다음 문제.

이슬기의 신작 이불 프로젝트(195x155x1㎝). 사진 갤러리현대


[문제2] 위 누비이불의 무늬가 나타내는 속담은 무엇일까.
통영의 누비 장인과 협업한 ‘이불 프로젝트:U’의 신작이다. 1980년대까지 흔했던 현란한 색상의 누비 이불, 프랑스 친구들도 좋아하겠다 싶어 선물하려 찾아다녔지만 "그런 건 더는 팔지 않는다"는 얘기만 들었다.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2015년의 일이다. "태어나고, 자고, 죽고, 사랑하고…. 이불 밑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잖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 물건에 속담이라는 공동체의 유산을 숨겨두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새하얀 진주 명주를 한 줄 한 줄 곱게 누빈 이불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거기 담긴 속담을 맞추는 재미가 있다. 답은 ‘부아가 나다’. 허파(부아)가 옆으로 팽창해 수평으로 늘어난 모습을 도안화했다.

핑크색 종이를 종이죽으로 만들어 코가 큰 가면으로 빚은 'K(계란코)'를 든 이슬기. 'K'는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인물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사진 갤러리현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뼈대만 남기고 가는 단순미"를 추구하는 그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재밌어서", 새로운 걸 배우는 게 늘 재미있다는 이슬기는 "재미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세련된 미술 언어로 표현하는 ‘미술 인류학자’ 이슬기는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상 최종 수상자로 선정됐다. 오는 9월 프랑스 리옹 비엔날레에 참여한다.

이슬기, 느린 물, 2021, 나무 문살에 단청 채색. 사진 갤러리현대


전시엔 ‘현판 프로젝트’와 ‘이불 프로젝트: U’를 비롯해 단청 장인과 협업해 만든 벽화 ‘모시단청’, 미국의 ‘핀볼’, 일본 ‘파친코’의 기원이 된 플랑드르 지방의 옛 장난감에서 착안한 '바가텔' 등 30여 점이 나왔다. 8월 4일까지. 무료.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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