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문화센터에서 시작된 우정

조영준 2024. 7. 1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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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371]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철봉하자 우리>

[조영준 기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철봉하자 우리> 스틸컷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는 미학과 출신으로 만년 백수로 살아온 석주(손수현 분)에게 격변의 시기와도 같았다. 단기여도 쉽게 구할 수 있던 일자리는 거리 두기 등 정부의 각종 정책 이후 자취를 감췄다. 코로나에 걸리면 양성 반응이 뜬 코로나 키트를 중고 거래로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동네 문화센터의 모든 강좌가 현장 강의에서 온라인 강의로 변경된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다행스러웠다. 인터넷으로 강의해 본 적이 없는 강사들은 카메라 앞에서 말조심하는 법을 몰랐고, 정식 공개 전에 이런 말실수를 편집할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해졌다. 석주가 맡은 일이다. 

같은 문화센터의 클라이밍장에서 처음 만난 맹지(송예은 분) 또한 석주가 맡은 동영상 강의 강사 가운데 한 명이다. 종이접기를 가르치고 있는 그녀 또한 코로나 영향으로 현장에서 화면 속으로 옮겨왔다. 석주가 맹지를 기억했던 건 또래이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화면 너머에 있는 자신에게 사과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맹지)가 기르던 흰 고양이 소금이는 이따금 화면 사이를 횡으로 넘나들었다. 사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녀의 강의는 모두 송출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석주는 화면 속의 맹지를 알지만, 화면 속의 맹지는 석주를 알지 못하는 상황.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이 친구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목충헌 감독의 영화 <철봉하자 우리>는 두 인물 석주와 맹지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친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힘겨운 시절을 함께 지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관계의 교집합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에피소드는 지나가 버린 시절의 특수성과 살아가는 동안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보편성을 모두 아우르며 두 사람의 모양을 완성해 간다. 이 작품은 '계간 문학들' 2024년 봄호에 실린 예소연 소설가의 단편소설 <우리 철봉하자>가 원작이다. 소설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던 코로나 시기의 배경적 설정이 더해졌고, 크로스핏이던 두 사람의 공통분모가 클라이밍으로 바뀌는 등의 몇몇 지점의 각색이 있었다.

02.
석주와 맹지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클라이밍을 하기에 팔힘이 약해도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몸을 풀기 위한 풀업도 하나 제대로 할 수 없고, 홀드를 몇 개 잡고 오르기도 전에 계속 떨어진다. 코로나로 수강생이 두 사람뿐이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같이 운동하지 않겠냐는 맹지의 제안에 석주가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이유다. 물론 실제로 늘어나는 것은 친목이라는 명목의 술자리다. 두 사람의 팔힘은 여전히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이를 계기로 친구가 된다.

이 장면 뒤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석주가 즉석만남 앱을 지우고 말을 걸어오는 낯선 남자의 대화를 무시하는 장면이다. 짧은 구간이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의미가 담긴다. 맹지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가 어떤 생활을 해 왔는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지내왔는지와 관련한 문제다. 다함(임투철 분)이라는 오래된 남자친구와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온(만나고 헤어지고를 끊임없이 반복하기는 하지만) 맹지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 또한 암시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만남에는 일반적으로 친구를 만드는 일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누군가를 쉽게 마주할 수 없었던 시절의 인연, 서로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여 있던 이들의 만남. 마냥 동등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애초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먼저 지켜보다가 이루어진 관계와 같은 감춰진 문장들이 두 사람의 명랑한 첫 만남 이면에 놓인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보통의 관계들이 모두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며 공동의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충돌하고 부딪힌다. 다른 만남을 쉽게 도모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두 사람 사이는 조금 더 그렇게 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철봉하자 우리> 스틸컷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03.
"되돌리고 싶어. 그치만 나는 되돌리는데 젬병이니 안 되겠지."

문화센터의 편집 작업을 시작한 석주가 담당자에게 제일 먼저 들은 말은 적당히 하라는 이야기다.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영화 속에서 어떤 대사는 극의 반복되는 상황이나 인물의 굳어진 성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너무 열심히 하면 페미 같아 보일 수 있어요. 문제가 안 될 정도로만 해요"라는 담당자의 대사가 그렇다. 극의 중심에 놓여있는 석주는 그렇게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 코로나 이전까지 만년 백수로 살아온 것도 그렇고,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과정에서도 그랬다. 클라이밍 하는 모습도 그리 치열해 보이지는 않고, 조금 훗날의 이야기지만 맹지와의 관계도 적당한 태도로 일관한다.

문제는 겉으로는 좋아 보이는 이 '적당한 태도'가 마지막까지 잘 유지되지 못하는 데 있다. 가장 가까이는 문화센터의 편집 일이 그랬다. 담당자의 당부대로 적당히 일하던 석주는 어느 순간에 완전히 폭발한다. 은근한 여성 비하를 던지는 동영상 속 강사의 태도 때문이다. 이는 분명 당위 있는 행동이지만 '적당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맹지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맹지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다 결국 실패한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는 동안에 자신의 삶을 대하던 모습은 또 어땠나. 상황이 완화되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변화 속에서 석주가 맞이하는 결과는 실직뿐이다. 모른 척 미뤄둔 일은 결코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한 번에 되돌아온다.

04.
한편, 맹지는 혼자가 되는 일이 불안한 인물이다. 남자친구인 다함과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매번 석주를 찾아 답답해하면서도 그 손을 쉽게 놓지 못한다. 클라이밍장에서 먼저 석주에게 인사를 건네고 운동을 같이하자는 제안을 건넨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의 행동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시대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친구와는 반복적으로 갈등을 겪었으니 또 다른 한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이후에도 그녀는 집이 빌 때마다 석주를 집으로 초대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석주의 딜레마는 여기에서도 발생한다. 맹지의 옆자리는 언제나 대체 가능하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다함이 있어서다. 두 사람이 함께 철봉을 하던 첫 장면에서 느닷없이 고백 아닌 고백을 하며 감추고 있던 감정을 불쑥 꺼내며 다투게 된 것도, 이후 일방적인 사과를 하며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더부살이하며 안간힘을 써보려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맹지를 가까이 둘 수 있었던 코로나 시기도 끝나갈 기미가 보이고, 안정적인 줄 알았던 일자리가 없어질 상황에 놓인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둘 사이의 문제는 점차 커진다. 석주의 즉석만남 앱이 다시 설치되는 것도 이즈음이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철봉하자 우리> 스틸컷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05.
"너는 너를 좀 더 돌봐야 해. 좀 더 사랑하고."

영화는 후반부에서 조금씩 망가진 두 사람의 삶이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석주는 맹지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독한 물파스를 두 눈에 잔뜩 바르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한다. 언젠가 다함이 이 방법으로 그녀의 마음을 구한 적이 있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이 사건 당시 맹지는 남자친구에게 영원한 이별을 통보한다. 두 사람이 함께 다시 철봉 앞에 섰을 때, 맹지는 석주에게 자신을 더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꼭 필요한 말이다. 석주뿐만이 아니라 맹지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외부의 다른 무언가에 기대는 삶은 언젠가 반드시 무너지는 법이다. 적당한 자리에 머물고 싶은 존재는 없다.

누군가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말을 걸어오는 듯한 영화의 수면 아래에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 대한 다양한 통찰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솔직하고 마음을 다해 표현하며, 망설이지 말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일은 그제서야 가능하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기 보다, 그렇기에 시도 해야만 하는 것.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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