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경의 에듀 서치] 보신주의와 헤어질 결심한 교육부… 이제 뚝심이 필요한 시간
수험생들 불안… 불확실성 극대화
수능 성적 등 교육데이터 개방
교육부 후폭풍 우려에도 용기 내
이쯤 되면 정부가 사교육의 ‘특급 도우미’ 아닐까요. 지난 1일 공개된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 채점 결과를 보면 이런 의심을 거둘 수 없습니다. 영어 90점 이상인 1등급 수험생 비율이 1.47%로 나왔습니다. 역대 수능과 공식 모의평가를 통틀어 최저 비율입니다. 대다수 수험생이 등급 하락을 맛봤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모의평가 갖고 과민 반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쉽게 볼 시험이 아닙니다. 대입 전반에 영향을 주는 시험입니다. 수시와 정시가 얽힌 현행 대입에서 6월 모의평가는 수시 지원 대학을 정할 때 판단 기준으로 활용됩니다. 수시 지원 대학을 정하려면 지원 대학의 수능 최저학력기준 충족 여부와 정시에서 합격 가능 대학을 가늠해야 올바른 전략을 수립할 수 있습니다. 우직하게 공부만 하면 낭패 보기 쉽도록 설계된 게 현행 대입입니다.
‘1%대 영어 1등급’이 던진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새 출제 방식에 적응 못 하면 ‘수능 최저학력기준 충족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서둘러 다음에는 좀 쉽게 내겠다고 했지만 늦었습니다. 그간 노력이 물거품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수험생을 이미 덮쳤습니다. 사교육은 불안감과 불확실성을 먹고 살아갑니다. 정부가 학생과 학부모를 사교육으로 내몬 셈입니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험생들이 바뀐 출제 패턴에 적응 못 한 탓이라고 했습니다. 지난해 ‘킬러문항’ 논란 이후 수능 출제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어려운 문항 몇 개로 상위권을 변별하던 방식에서 헷갈리는 선택지 이른바 ‘매력적 오답’ 등으로 여러 함정을 파놓는 방식으로 말이죠. 킬러문항을 없애려던 시도는 시험 자체를 ‘킬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정치 권력이 함부로 입시에 개입해 현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상황이 낯설지는 않습니다. 과거 고교 1~3학년 모든 학년에 다른 입시 제도가 적용될 정도로 들쑤셔놓는 일도 있었습니다. 박근혜정부 때는 수능 영어 절대평가를 들여와 ‘사교육 풍선효과’를 일으켰습니다. 문재인정부 때는 수시·정시 논란을 일으키더니 고교학점제와 정시 확대라는 상극의 정책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사교육비가 가파르게 뛰었습니다.
그때마다 교육부는 무력하고 무책임했습니다. 인사권을 가진 권력에 브레이크 걸 방법이 없다는 게 그들의 항변이었습니다.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 권력에 순응하면 꽃길, 딴죽 걸면 좌천이니 권력의 요구를 평소 자기 신념인 듯 스스로 세뇌해가며 ‘편한 길’을 택했다고 봅니다. 권력이 교체되면 입장은 손쉽게 바뀝니다. 학생·학부모는 안중에 없습니다. 툭하면 교육부 폐지론이 고개 들고, 이럴 때 교육부 주변에 우군 하나 없는 이유일 겁니다.
교육부에 저항할 수단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입시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지역별 수능 점수 격차는 어느 정도인지, 아파트 가격과 수능 성적은 실제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지, 계층 사다리 복원에 유리한 전형은 무엇인지 등입니다. 교육학자뿐만 아니라 경제, 노동, 복지 등 다양한 분야 연구자가 연구하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죠. 과학적 연구에 바탕을 둔 입시 제도를 수립한다면 강력한 권위를 갖게 될 겁니다. 사회적 합의 수준도 한 차원 높아집니다. 아무리 서슬 퍼런 권력이라도 함부로 손대지 못할 겁니다.
‘보신주의’ 탓에 정보가 공개되지 못했다고 봅니다. 교육부와 정보 공개를 두고 옥신각신하다 보면 종종 이런 속사정을 듣게 됩니다. “이런 데이터 공개 가능할까요.”(기자) “그런 정보 없어요.”(교육부 담당자) “왜 없나요?”(기자) “그렇게 민감한 데이터 생산하지 않습니다.”(담당자) “정책 만들 때 필요할 수도 있을 텐데요.”(기자) “그런 정보 생산하면 국회에 소문 날 수밖에 없고 공개 안 하기 어렵습니다.”(담당자)
교육부의 처지도 이해는 갑니다. 입시의 민낯이 드러나면 교육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질 겁니다. 관료들은 문제가 터진 상태에서 대책을 요구받는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드러낼 때 동시에 대책을 내놓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게다가 입시를 제대로 손보는 일은 교육부 혼자서는 버거운 일입니다. 노동, 복지 등 사회 전반의 문제가 투영돼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의대 블랙홀’ ‘이공계 황폐화’ 같은 문제는 입시 제도가 아니라 일자리나 복지 정책에서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교육부가 최근 ‘교육데이터 개방 및 활용 확대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수능과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등 각종 데이터를 학계에 제공키로 했습니다. 앞으로 연구자가 요청하면 심사를 거쳐 학교 이름이나 학생 개인 정보를 비식별 처리하고 제공합니다. 입시 데이터뿐 아니라 학생의 소득수준이 드러나는 장학금 통계 등도 제공합니다.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죠.
발 빠른 연구자들은 이미 국가장학금 통계와 수능 성적, 학업성취도 결과 등을 결합해보려고 데이터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데이터를 요청한 한 대학교수는 기자에게 “입시가 어디서 병들었는지 진단해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교육부도 여러 갈래로 연구가 진행되길 기대하는 눈치입니다.
데이터가 공개되고 연구가 진행되면 당분간 교육부는 학교와 지역을 서열화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겁니다. 과거 정책이 현장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드러나 책임론에 시달리는 상황도 가능합니다. ‘괜한 짓 했다’는 교육부 내부 비판도 상당할 겁니다. 이를 충분히 예상하고도 보신주의에서 탈피하려고 용기를 낸 것에 응원을 보냅니다. 비판에 움츠러들어 과거로 돌아가지 않길 바랍니다. 결심은 했으니 이제 뚝심이 필요한 시간일 겁니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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