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칼럼] 제헌절과 민주공화제

2024. 7. 10.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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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제헌절을 맞아 우리 헌법을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제1조 1항으로 시작된다. 이 조항은 헌법제정 이후 9차례의 개헌에도 변하지 않은 우리나라 국가 정체성이자 국시(國是)이다. 더 나아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임시헌장 1조에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국시인 민주공화제를 잘 지키고 있는가? 민주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강조하는 기본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민주제는 개인의 권리가 선거를 통해 일정 기간 다수의 지지를 받은 사람들이 개인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대의제를 바탕으로 한다. 군사독재 정권을 거쳐 1987년 민주화 체제가 자리를 잡으며 우리는 개인의 권리가 신장된 민주제를 발전시켰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에 설치된 제22대 국회 개원 현수막이 제76주년 제헌절을 알리는 현수막으로 교체되고 있다. 5일 열릴 예정됐던 22대 국회 개원식은 '채상병특검법'을 둘러싼 여야 충돌의 여파로 무기한 연기되어 열리지 못했다. 연합뉴스

「 민주화 발전했지만 공화제는 퇴보
형식적 민주화로 권력 독점 폐해
미래지향 획기적 개헌안 마련해야
공화제 정착 위한 정치 리더 키워야

하지만 공화제는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 공화제는 더불어 사는 사회의 핵심적 정치철학이다. 로마공화정은 독재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정이 아니라 집정관, 원로원, 민회가 서로 세력 균형을 이루며 상호 협력하여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체제였다. 로마공화정의 유산은 이후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혁명 당시 입법, 행정, 사법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기본 틀로 자리 잡게 되었다.

22대 국회는 헌정사상 최초로 야당 단독 개원을 했고 단독 원 구성 강행까지 언급되다가 개원 28일 만에야 가까스로 원 구성을 마쳤다. 하지만 막말과 모욕으로 점철된 상임위 운영과 특검법, 방송4법 등으로 여야의 정쟁은 끝이 없다. 우리의 국시인 공화의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6월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15회국회(임시회) 제3차 본회의의 모습. 22대 국회는 헌정사상 최초로 야당 단독 개원을 했고 단독 원 구성 강행까지 언급되다가 개원 28일 만에야 가까스로 원 구성을 마쳤다. 뉴스1

250년 전통 미국 민주주의도 위기를 겪고 있다. 삼권분립 대통령제를 수립하여 전 세계에 전파한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과 규범이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심각하게 붕괴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정치학과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도 양보와 타협보다는 서로 적대시하며 절제되지 않은 언행으로 전통적 민주주의 질서를 흔들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들의 최근 저서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는 합법과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극단적 열성 지지자들로 인해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것을 지적한다. 형식화된 민주절차만 거치면 권력을 독점하여 포퓰리즘 정치를 거리낌 없이 행사하여 민주주의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호관용(mutual tolerance)과 자제(forbearance)라는 두 규범적 가치가 필수적이라고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역설한다. 지금 우리 정치현장에서 실종된 것이 바로 이 두 가치다.

신임 우원식 국회의장은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논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제만 바뀌면 정치의 극단적 대치와 갈등이 소멸될까? 정치가들이 공화제의 기본 철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국가의 미래발전에 대한 국정철학이 없으면 대통령 중임제 개헌만으로 정치가 선진화될 리 없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지난 2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패널 질문에 답하고 있다. 우 의장은 이 자리에서 "개헌을 통해 (대통령) 5년 단임제가 가진 갈등의 요소를 없애고 권력 구조와 정치·정서적 극한 대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1

오히려 개헌을 논의하려면 87년 체제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국민들은 안다. 국회의원이 되면 그들의 최우선과제가 재선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국회의원 임기를 5년이나 7년 단임제로 하여 보스나 당 지도부 눈치 보지 않고 국가에 봉사하게 할 수는 없는지. 국민들은 안다. 정당 공천제가 정당의 이념이나 철학보다는 보스의 눈도장에 좌우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정당 공천제를 없애고 누구나 정당을 배경으로 총선에 입후보하되 과반수를 얻지 못하면 결선투표를 하면 어떨지. 국민들은 안다. 국회의원이 재선을 위해 지역구의 이익만 대변하며 예산확보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중대선거구제로 바꿔 지역보다 더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것이 어떨지. 국민들은 안다. 국회의원들이 미래의 문제에 관심이 없어서 연금개혁 하나도 제대로 못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국회를 양원제로 하되 원로원이 아니라 사십대 이전 세대로만 구성된 미래원의 국회의원들이 미래 문제를 다루면 어떨지.

250년 전 대통령제를 발명한 미국처럼 우리도 새로운 미래 정치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다. 정치는 정답을 갖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타협하고 양보하며 답을 찾아 나가는 예술이다. 그렇기에 개헌을 통한 제도개선도 필요하고 정치지도자들의 능력과 자질, 그리고 국가 리더로서의 인품을 체크할 수 있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민주화 이후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은 공화제의 정착이다. 정치가 상호 관용과 절제를 통해 사회문제를 풀어나가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붕당정치의 폐해를 조선의 역사에서 잘 경험한 우리가 이를 재현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1세기에 걸맞은 제대로 된 개헌과 정치지도자 양성 시스템을 통해 우리나라 정치개혁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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