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건의 시시각각] 평화 엔트로피의 법칙
지난달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더불어민주당에서 거리에 걸어 놓은 현수막 중 하나가 ‘평화가 안보’ ‘대결이 아닌 대화로 풀어야’였다. 평화와 안보는 대체로 함께 사용되는 동반어라 한 문장에 담겨 있으면 익숙하다. 그런데 곱씹어 보면 뭔가 어색하다. 평화가 안보일까, 안보가 평화일까.
나라의 질서와 안녕이 유지되는 평화로운 상태에 있어야 외부의 도전과 위협에 덜 휘둘린다는 ‘평화가 주는 지구력’을 뜻한다면 ‘평화=안보’가 맞겠다. 하지만 평화의 지속가능성으로 본다면 안보가 평화를 보장하지 평화가 안보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게 상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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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용 안 치르면 무질서로 퇴행
주변국 모두 자국 최우선 주의
말 아닌 의지와 실력으로 지켜야
」
역사의 무수한 국면에서 나라의 평화는 희생과 실력을 기반으로 유지됐다. 나라의 흥망성쇠뿐이겠는가. 인생사도 같은 이치다. 우리 인생에서 거저 누린 평화가 있었다면 우리 부모님 또는 우리를 사랑했던 누군가가 희생하고 땀을 흘려 미리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올해 대한민국의 평화엔 59조원이 들어가 있다. 2024년 국방예산이 59조4000억여원이다. 이 돈으로 상비군 50만 명을 유지한다. 상비군 다수는 황금 같은 20대의 시간에서 최소 18개월을 떼어내 나라에 낸 젊은이들이다. 지금의 평화는 누군가가 낸 돈과 청춘으로 유지된다. 평화는 그래서 엔트로피의 법칙이 적용된다. 평화를 유지하려면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며,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무질서로 퇴행한다.
동시에 평화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규정된다. 평화를 주창할 땐 상대에게 평화를 강요할 수 있는 억제력, 받아들이도록 만들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억제력도, 설득력도 없는 평화는 꿈으로 그친다.
‘대결보다 대화’, 맞는 말이다. 단, 평화를 지킬 능력이 있어야 대화로 나설 수 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상황에 끌려갈 뿐 주도할 수 없다.
사실 우리의 의식과 언어는 변증법적으로 서로를 규정한다. 뇌가 언어를 지배하지만, 언어 역시 인식을 규정한다. 인식은 언어로 표현되면서 형태를 입는다. 개인의 인식과 함께 사회적 담론도 집단의 언어로 규정된다. 평화 자체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기대가 한국 사회의 주된 담론이 되면 자칫 냉정한 현실에 눈감은 채 집단 최면에 빠질 수 있다.
지금 동북아 정세는 안보의 중요성을 더욱 보여준다. 북한은 한국을 상대로 틈만 나면 핵 공격을 운운하고 있다. 핵 공격을 놓고 예컨대 북한이 쏜 전술핵 미사일이 서울 상공에서 폭발해 수만 명이 즉사하는 걸 상상한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북한의 핵 파괴력은 핵 공격 이전에 발생한다. 북한이 돌연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전술핵 미사일 몇 기를 지상에 노출한 뒤 전선에 병력을 집결하고, 한미연합사가 데프콘 경보를 상향 발령한다. 얼마 후 외신이 국내 거주 미국인의 일본 철수(NEO·비전투원 소개 작전)를 전 세계에 타전하며 한국 자산시장에 충격파가 온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구사했듯 현대전은 SNS를 심리전에 동원하는 하이브리드전이다. 외국 자본이 속속 한국 시장을 빠져나가는 와중에 SNS에서 북한발 유언비어가 횡횡하며 사회가 공황 상태에 빠지면 북한은 핵을 쏘지 않고도 대한민국의 경제·행정을 마비시킬 수 있다.
정도만 다를 뿐 주변국 모두 녹록지 않다. 중국은 미·중 대결 속에서 한국을 대하며 한국 길들이기를 고수하고 있다. 양국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일본 우익은 여전히 과거사를 직시하지 않는다. 이번에 한반도에 새롭게 발을 들이민 러시아는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 외교를 구사하려고 한다. 동맹국 미국이 11월 대선 이후에도 지금과 같은 미국일지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마치 구한말처럼 주변국들이 일제히 자국 최우선주의를 내걸고 노골적 압박 외교도 서슴지 않는 지금,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건 의지와 실력이다. 아름다운 말로 아름다운 세상이 오지는 않는다.
채병건 Chief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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