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재정 파국 막아줄 ‘예산 파수꾼’을 보고 싶다
재정이라는 틀은 과거·현재·미래를 관찰할 수 있는 투시경이다. 재정을 통해 예산의 규모와 내용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왔는지, 각종 사업의 예산 이력은 어떠한지, 미래의 재정 총량은 얼마인지, 미래를 바꾸려면 어떤 청사진과 전략을 준비하고 실행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국회예산정책처(NABO)의 ‘2023~2032년 중기 재정 전망’에 따르면 국세 수입은 10년 동안 5조1000억원 감소하고, 의무 지출은 29조5000억원 증가할 것이라 한다. 돈 쓸 곳은 많은데 돈 들어올 곳은 없는 10년 후의 재정 기상도를 미리 보여준다. 국고 수입과 지출을 잘 맞춘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이지만, 문제는 재정수입과 재정지출의 격차가 갈수록 커질 거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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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지는 재정 수입과 지출의 격차
편성·심사·집행 참여자 역할 중요
소신 갖고 재정의 본령 지켜내야
」
2년 전 건전재정포럼에서 20대 청년이 공감하는 국민연금 개혁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다. 국민연금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물었다. 빙하, 시한폭탄, 낡은 동아줄, 마르는 샘물, 밑 빠진 독, 해변의 모래성, 구멍 난 저금통, 선착순, 세대 갈등, 카운트다운, 폭탄 돌리기, 못 받는 돈 등이란 답이 나왔다.
모두가 터질 것을 알고 터질 시점까지 알고 있는데 누구도 폭탄을 해체하려 하지 않는 것은 정치인과 행정가의 직무유기라고 청년들은 비판했다. 연금의 불투명·불공평·무책임에 대한 미래 세대의 우려와 걱정은 누가 덜어줄 것인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는 막대한 재정수요로 이어지기 때문에 소요 재원 마련이 급선무다. 그러나 세수 결손이 빈번해지고 재정적자 보전을 위한 국채 발행이 늘어난다면 복지 예산의 지속가능성은 떨어진다. 보육·교육·의료·연금 등 산적한 현안의 비용 확보 방안뿐 아니라 현금성 재정 지원의 득실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필요하다.
광범위한 재정 관련 과제를 해결하려면 예산의 편성·심사·집행 과정에 참여하는 주역들이 소임을 다해야 한다. 정치적 시장과 예산 시장, 정책 시행 시장에서 재정 규율을 지키는 ‘예산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고 담대하게 수행해야 한다. 예산과 기금의 불법 지출에 대한 국민감시(국가재정법 제100조)도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져야 한다.
‘미국 예산의 파수꾼’으로 유명한 윌리엄 프록스마이어 민주당 6선 상원의원은 1988년 72세로 정계를 은퇴하면서 의정 생활의 대부분을 예산 낭비를 막는 데 바쳤다고 회고했다. 그는 ‘낭비적이고 어처구니없고 모순된 세금 낭비 사례’에 수여하는 ‘황금양털상(Golden Fleece Award)’을 제정한 것을 대표적 업적으로 꼽았다.
짐 쿠퍼 민주당 하원의원은 정부의 과학 예산을 받아 연구하는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 중 인류에 공헌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황금거위상(Golden Goose Award)’을 만들었다. 돈 먹는 하마처럼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연구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데 착안했다. 의사 출신의 톰 코번 공화당 상원의원은 ‘닥터 노(Dr. No)’로 불릴 만큼 혈세 낭비를 앞장서 질타했다.
2004년 CBC의 ‘가장 위대한 캐나다인’ 조사에서 ‘의료 보험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미 더글러스 전 서스캐처원 주지사가 선정됐다. 그는 “국민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것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으며 우리는 가장 불행한 이들을 함께 돌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득권의 반발에도 공익에 부합하는 정책에 대한 뚜렷한 소신을 지켰고, 정치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보편적 의료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사례들은 하나같이 예산 파수꾼의 굳은 신념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독한 ‘재정 중독 질환’에 걸린 포퓰리스트들이 나랏돈을 생색내기용 쌈짓돈으로 흥청망청 써왔던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의 운명은 달랐다. 하버드대 니얼 퍼거슨 교수는 “제국의 패망은 언제나 급격하게 이뤄졌다”며 재정 위기는 산술적인 규모 자체보다 그로 인한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가 관건이라고 경고했다. 재정적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 선심성 퍼주기 정책의 치명적 해악의 실체를 규명하고, 분별 있는 시각으로 재정의 본령을 굳건하게 지켜낼 진정한 예산 파수꾼을 보고 싶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해룡 중앙대 행정대학원 교수·전 국회예산정책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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