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조 돌파한 ETF 시장…외화내빈?
저렴한 비용과 분산 투자를 앞세운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이 최근 국내 순자산 150조원을 돌파했지만 ‘외화내빈’ 지적이 들끓는다. 대동소이한 테마형 ETF가 난립한 가운데 국내 ETF 점유율 상위 운용사 간 볼썽사나운 수수료 출혈 경쟁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공모 주식형 펀드 시장이 고사 직전 위기에 처한 가운데, ETF 시장마저 금융 소비자 불신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유사 상품 난립
수수료 ‘출혈 경쟁’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7월 3일 기준 국내 ETF 순자산 총합은 154조2419억원, 종목 수는 864개로 각각 집계됐다. 6월 18일 국내 ETF 순자산 총합은 150조6057억원을 기록하며 처음 150조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6월 29일 ETF 순자산이 100조원을 넘어선 이후 불과 약 1년여 만에 시장 규모가 50% 이상 성장한 것이다.
우리 ETF 시장은 외형적으로는 급성장했지만 질적 성장에는 물음표가 던져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세계 시장에 견줘 한국 ETF 시장은 순자산 규모 대비 ETF 종목 수가 지나치게 많다. 글로벌 ETF 리서치 기관 ETF GI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기준 전 세계 ETF 순자산 규모는 약 12조6000억달러다. 종목 수로는 1만728개다.
같은 시점 국내 상장 ETF 순자산 규모는 약 146조원이다. 이는 세계 시장에서 약 0.8% 비중으로, 1%에도 못 미친다. 종목 수로는 약 8%(868개)가 한국 상품이다. 순자산 규모에 비해 종목 수가 많은 것은 그만큼 투자자 선택을 못 받은 상품이 많다는 의미다. 특정 상품이 인기를 끌면 우후죽순 유사 상품을 쏟아내는 운용업계 관행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는 게 다수 전문가 시선이다.
유사 상품 난립은 수수료 출혈 경쟁으로 귀결된다. 최근 운용업계에선 상위 운용사 간 과도한 수수료 인하 경쟁이 입길에 올랐다. ETF 점유율 1위 삼성자산운용은 일부 ETF 운용 보수를 기존 연 0.05%에서 0.0099%로 대폭 인하했다. 이에 미래에셋자산운용은 ‘TIGER 1년은행양도성예금증서액티브(합성) ETF’ 보수를 삼성운용보다 0.0001%포인트 낮은 0.0098%로 인하해 국내 최저 보수 타이틀을 빼앗았다.
ETF 수수료 ‘껌값’ 현실을 초래한 배경으로 몇 가지 이유가 지목된다. 무엇보다 국내 ETF 시장은 마치 주식판처럼 특정 테마형 ETF로 도배됐다. 상품간 차별화가 어렵다 보니 수수료 인하 외에는 고객을 유인할 수단이 거의 없다.
지난해에는 2차전지 관련주가 증시를 휩쓸자 관련 ETF가 줄줄이 나왔다. 미국 기준금리 인하 불확실성이 커지자 양도성예금증서(CD) 수익률 등 단기 금리를 추종하는 파킹형 상품이 쏟아졌다. 올 들어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이 각광받자 관련 ETF가 시장을 뒤덮었다. AI 외에도 올해 상장한 국내 ETF 대부분은 월배당, 커버드콜, 미국 주식 등 셋 중 하나다. 월배당 ETF만 60개 가까이 된다.
급기야 상위 운용사끼리 상호 반목을 빚는 모습도 나타난다. 지난 6월 24일 미래에셋자산운용 기자간담회가 단적인 예다. 간담회에서 이준용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이사 부회장은 “미래에셋은 라디오 광고를 통해 상품을 팔기 보다 투자자들에게 수익률로 증명할 수 있는 회사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동종업계를 겨냥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시장에서는 ‘내로남불 아니냐’는 뒷말도 따랐다.
운용업계 관계자는 “출혈 경쟁이 극한으로 치닫다 보니 경쟁사 ETF 신상품 출시 때면 선수들만 알 만한 약점을 콕 집어 금융당국에 익명으로 제보하거나 심지어 ‘셀프 민원’을 접수했다는 소문도 있다”고 털어놨다.
쏠림 심화·다양성 퇴보
ETF 고속 성장의 그늘도 짙게 드리웠다. 운용 산업 측면에선 쏠림 현상 심화와 이에 따른 상품 다양성 퇴보를 우려한다.
첫째, 주식 ‘단타족’처럼 테마에 편승해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행태는 중장기적으로는 우리 시장 쏠림 현상을 심화한다. 이는 사후 관리 부실로 이어져 투자자 불신을 키우는 불쏘시개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국내 운용사가 우후죽순 내놓는 특정 산업 테마형 ETF는 분산 투자와 거리가 멀다. 엄밀히 말해 테마형 ETF는 집중 투자형에 가깝다. 테마형 ETF는 펀드매니저가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액티브 ETF의 한 종류다. 액티브 ETF는 종목 구성과 비중 등을 정할 때 지수를 그대로 추적하는 ETF보다 펀드매니저 권한을 조금 더 반영한다. 물론 국내 테마형 ETF는 전체 시장과 상관계수를 0.7 이상 유지하도록 돼 있지만 투자한 산업이 전체적으로 흔들리면 수익률이 와르르 무너진다. 지난해 증시를 휩쓴 2차전지 ETF가 단적인 예다.
유행을 좇아 고만고만한 상품을 내놓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판을 치면서 상장폐지 위기에 몰린 ETF도 속출한다. 단기 테마를 좇아 상품을 내놓다 보니 유행이 끝나면 관리 소홀로 시장에서 외면받는 ETF가 수두룩하다. 자본시장법상 순자산 총액 50억원 미만인 ETF는 상장폐지할 수 있다. 현재 순자산 총액 50억원 미만 ETF는 80개가 넘는다. ETF 순자산 총액 50억원 미만인 상태가 1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상장폐지 사유에 해당한다. 순자산 총액 50억원 미만 ETF 가운데 3개월 평균 거래량이 1000주를 밑도는 ‘좀비 ETF’도 40개 안팎이다.
둘째, 상위 운용사 간 ETF 수수료 출혈 경쟁은 상품 다양성 퇴보를 더욱 부채질한다. 대형사를 중심으로 가파른 시장 집중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중소 운용사가 퇴출되고 이는 경쟁 강도 저하로 종국에는 상품 다양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단 우려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 펀드 시장은 미국 등 선진국 대비 규모 면에서 비교 불가다. 절대 규모 면에서 열위다 보니 미국과 달리, 국내에선 대형·중소 운용사 간 경쟁 영역이 겹치지 않는 이원화된 시장 구조 확립에 제약이 따른다. 이런 상황에서 점유율 상위 운용사가 수수료 제로 경쟁을 촉발할 경우 손익 구조가 취약한 중소 운용사는 상품 경쟁에서 버티기 힘들다는 게 다수 전문가 지적이다. 미래·삼성 등 대형 운용사는 특정 상품 수수료를 사실상 제로로 만들어도 다른 상품에서 벌어들인 이익이 버팀목 역할을 한다. 반면, 상품 구색이 제한적인 중소 운용사는 수수료 출혈 경쟁에 몰릴 경우 손익 변동성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클로짓 인덱싱’ 심화
운용사 간 ETF 수수료 경쟁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시장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크다. 블랙록 등 세계 1위 운용사 역시 수수료 인하 경쟁을 벌이지만 미국 운용사는 수익 구조 다변화로 수수료 의존도가 낮다. 덕분에 유사 상품 간 ‘제로섬’ 출혈 경쟁이나 부실한 사후 관리로 상장폐지되는 ETF도 드물다. 특히 ETF 수익 배분 구조가 다르다. 주식형 ETF의 경우, 미국 운용사는 ETF 편입 주식을 증권사 등에 빌려주고 대차 수수료를 수익으로 챙긴다.
블랙록은 대차 거래 수익 가운데 30% 정도를 회사와 자회사 몫으로 남긴다. 미국에서 상위 운용사가 수수료 제로 상품을 내놔도 별 탈이 없는 이유다. 우리 시장은 대차 거래 수익을 투자자에게 분배금(배당)으로 돌려줘야 한다. 운용업계 관계자는 “과도한 대차 거래에 따른 리스크를 우려하는 운용사가 존재하지만, 수익 구조 다각화를 위해 운용 외 수익을 일부 허용하는 방안에 대해 금융당국도 고민을 해줬으면 한다”고 털어놨다.
ETF ‘나 홀로 성장’은 산업뿐 아니라, 시장 측면에서도 부작용을 낳는다.
패시브 펀드가 지배적 투자 기조로 자리 잡은 것은 세계적 현상이기는 하다. S&P500지수와 액티브 펀드 수익률을 비교한 지표 SPIVA(S&P Indices Versus Active)에 따르면, 지난해 6월 말 기준 과거 1년, 3년, 5년, 10년, 15년의 투자 기간 동안 미국 대형주 액티브 펀드 가운데 S&P500보다 좋은 수익률을 기록한 펀드 비중은 각각 39%, 20%, 13%, 14%, 8%다. 투자 기간이 길수록 액티브 펀드가 초과 수익률을 달성할 확률이 낮다. 액티브 펀드 부진은 IT 기술 고도화로 기업·시장 정보가 가격에 빠르게 반영돼 과거보다 시장 효율성이 개선된 결과로 분석된다.
그럼에도 패시브 쏠림 심화는 증시 유동성·수급 측면에서 또 다른 비효율을 초래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계적으로 관련 종목을 담는 과정에서 ‘눈덩이 굴리듯’ 수급이 따라붙는 양상이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패낳괴(패시브가 낳은 괴물)’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다.
가령, MSCI 등 주요 패시브지수 편입 여부는 시가총액과 유동시가총액 등을 핵심 잣대로 결정된다. 특히, 유동시가총액을 두고 뒷말이 따른다. 유동시가총액은 대주주·특수관계인, 우리사주, 자사주, 전략적투자자(SI) 등 시장에서 거래할 수 없는 지분율을 차감한 ‘유동비율’과 시총을 곱해 구한다. 운용업계 관계자는 “유동비율을 높이려면 대주주·특수관계인 지분을 낮추거나 자사주를 매입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지배구조가 취약하다는 의미거나, 주주환원 동기를 제약하는 유인으로 작용할 수 있단 뜻”이라고 지적한다.
패시브 급성장의 더 큰 문제는 자본 시장 ‘클로짓 인덱싱(closet indexing)’ 현상 심화다. 이는 자본 시장 전체가 ETF처럼 지수와 비슷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전략을 일컫는다. 결국 펀드매니저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전체 시장 지수와 비슷한 방식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이는 중장기적으로 펀드 시장 활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지적이다.
이런 이유로, 국내 대표 운용사가 패시브 상품인 ETF에만 주력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최근 수년간 국내 주요 자산운용사는 사실상 공모 주식형 펀드 투자에서 손을 뗐다.
이보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직접 투자 선호가 두드러지고 패시브 투자가 늘면서 일반 공모펀드 성장세가 둔화됐다”며 “이런 투자 행태는 시장 비효율성을 증가시킬 우려가 있는 만큼 액티브 펀드·실물 펀드 등 다양한 공모펀드 상품 출시를 촉진하고 판매 보수와 수수료 체계를 유연하게 운영해 판매 채널 간 경쟁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7호 (2024.07.03~2024.07.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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