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걸린 엄마와 제주도에서 카페 차리는 게 가능할까
[조영준 기자]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알로하>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만은 없는 법이다. 시간은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다시 늙고 병들게도 만든다.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이들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각자가 놓인 생의 시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나 태도, 단어나 감정을 해석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문제는 한 사람이 가진 삶의 감각을 다른 한 사람이 오롯이 움켜줘야 할 때 일어난다.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한 감각의 차이는 수용까지의 시간을 확보하거나 거리를 두는 식의 여지를 마련할 수 있다. 같은 자리에서 포개지는 순간에 둘 중 하나를 미뤄두어야 한다는 것이 불편한 지점이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는 나중에 들어온 타인의 사정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다.
10년이 넘도록 배우 지망생으로 지내던 은우(공현지 분)는 이제 보험설계사로 일한다. 현실의 문제에 떠밀려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를 포기한 셈이다. 아주 미련이 남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배우의 자리를 갈망하지만,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엄마 말숙(안민영 분)을 대신해 이제는 자신이 가정을 돌봐야 한다. 아직 꿈꾸고 있는 미래의 모습이 하나 있다. 엄마와 함께 고향인 제주도로 다시 내려가 작은 카페를 하나 운영하는 것이다. 혼자만의 꿈은 하나 내려두었으니, 함께인 내일은 조금 더 간직해도 좋지 않을까.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알로하>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나 생각해 봤는데 스무 살 넘어서 혼자 여행한 적 한 번도 없더라. 이번에 혼자 가볼라고."
류정석 감독이 극 중 두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각각의 인물에게 하나씩의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놓는 방식이다. 각자의 자리에 하나씩, 그리고 서로의 자리에 또 하나씩. 딸의 개인 서사에 해당하는 것(A')은 배우의 꿈과 보험설계사로서의 현재와 같은 부분이다. 여기에는 부지점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시간여행자 남궁원과의 에피소드 역시 포함된다. 사업운도 없고 관운도 없어 천상 배우의 사주를 타고났다며,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계속 배우를 꿈꿔야 한다는 말. 반대로 엄마의 자리에 놓인 은우의 서사(A'')는 제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함께 보낼 내일의 현실이 놓인다.
한편 엄마 말숙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한다. 말숙의 개인 서사(B')는 30년 전의 소포로부터 시작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 시절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 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여러 고난과 아픔의 시간마저 용서된다.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그 시절의 감정과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다. 비록 또렷하고 선명하게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한편 딸의 자리에 놓인 서사(B'') 속 말숙은 단순히 치매에 걸린 엄마에 불과하다. 기억을 잃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로 딸에게 기댄 가련한 인생이다. 내일의 계획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딸의 의지에 가깝다. 치매 보험을 들어 보험비를 받자는 제안도, 그 돈으로 제주로 내려가 카페를 하자는 것도 모두 다 은우의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에 자신의 꿈은 하나도 없다.
03.
네 가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관계가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서사(A') 가운데 일부(배우의 꿈)를 포기한 은우와 개인의 서사(B')를 잊고 지내던 말숙이 함께였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두 서사 사이에서 조금 더 희생된다고 여겨지는 것은 은우다. 딸이라는 자리의 문제는 아니다. 엄마 말숙의 경우에는 치매로 인해 기억을 잃고 있었고 자신의 서사(B')가 이어지는 일상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탓이 더 크다. 갑자기 전해진 소포가 감춰져 있던 엄마의 서사(B'')를 건드리고, 이는 은우의 서사(A'')와 부딪힌다.
안정적인 줄 알았던 은우의 서사(A'')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엄마의 서사(B'')와 충돌하게 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동안 숨겨두었던 은우의 서사(A')다. 일종의 반동이다. 엄마의 솔직하고 투명한 고백 앞에서 은우는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을 강하게 터뜨리고 만다. 자신의 생일도 까먹고, 현관문 비밀번호도 곧잘 잊어버리는 엄마를 위해 자신이 내려놓아야 했던 꿈과 두 사람을 배신하고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 같은 것들이 뒤섞였다.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자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신 개인의 꿈에 이어 함께 설계하고자 했던 내일의 꿈마저 포기해야 한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알로하>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영화는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의 방법을 찾은 것으로 그려나간다. 이번에도 역시 각자의 자리에 놓인 개인의 서사(A', B')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은 아니다. 누군가를 곁에 두고 끌어안는 일에는 자신의 품을 내어주는 과정이 필요하고, 어느 정도 포기하는 일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서로의 발이 닿을 수 없는 서사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여전히 존재한다. 엄마의 오래된 기억을 위해 일기를 바탕으로 한 오래된 이야기를 녹음해 들려주는 딸은 여전히 '알로하'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배우의 꿈 앞에 다시 선 은우를 응원하는 엄마도 그 과정에서 겪게 될 어려움을 오롯이 알지 못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엄마의 모습들.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오래된 시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치매 환자가 경험하는 퇴행의 일부가 비유된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그런 뉘앙스를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시선을 가지고자 했지만, 극의 전체를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시 한번 바라보면 마지막 장면이 남기는 여운은 더욱 짙고 강해진다.
안녕. '알로하'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자식과 부모 사이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뜻보다 훨씬 더 문화적이고 영적인 의미다. 어쩌면 이 작품은 부모님에게 드리는 전상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어딘가에서 지울 수 없는 회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들딸의 전하지 못한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나중에 할 후회는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영화의 말이 조금은 슬프게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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