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9개에서 멈춘 만보기... 엄마가 모르는 아이의 위기

조영준 2024. 7. 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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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369]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4000BPM> 외 1편

[조영준 기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4000BPM> 스틸컷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01
<4000BPM>
한국 / 2023 / 극영화
감독 : 황지완

"줄넘기 다 했어? 어디 봐. 4000개 다 채웠나."

집 아래 공터에서 줄넘기를 하던 상훈(유연석 분)은 엄마(정도희 분)가 시킨 4000개까지 한 개를 남겨두고 공동 현관의 인터폰을 누른다. 3999개. 정확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엄마는 나머지 한 개를 다 채우고 집으로 들어오라지만, 만보기의 수는 아무리 뛰어도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고장이 난 것 같다. 최근 들어 매일 이렇게 내려와 줄넘기를 뛰었으니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상훈은 만보기의 수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보같이 계속해서 줄을 넘는다. 자신이 넘는 줄넘기의 수보다는 기계에 기록되는 수치를 꼭 맞추고야 말겠다는 듯이.

영화 <4000BPM>에는 다른 영화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전개 방식, 그중에서도 특히 위기의 형성에 해당하는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4000개의 줄넘기를 넘어야 하지만 만보기의 고장으로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위기다. 귀엽고 사소한 위기.

하지만 이 걱정 역시 그의 줄넘기를 몰래 지켜보던 선아(서이수 분)가 등장하며 흩어지고 만다. 두 사람 모두 할 줄 모르는 2단 뛰기를 위해 번갈아 넘던 줄넘기 줄은 곧 원래의 용도와는 무관한 놀이의 도구가 된다. 황지완 감독이 두 사람의 저항 없이 깨끗하고 해맑은 모습을 통해 그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훈이 선아를 만나게 되면서, 줄넘기는 이제 더 이상 엄마가 정해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게 된다. 이 사실은 선아가 등장하기 이전과 이후, 두 장면에 걸쳐 표현되는 상훈의 표정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처음부터 프레임의 중심에 놓여 있던 인물이 상훈이어서 그의 표정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지, 선아 또한 그렇다. 상훈의 외로운 줄넘기를 물끄러미 몰래 쳐다보던 처음의 모습, 그녀의 손에는 무거운 책가방이 들려 있었다. 조금은 지쳐 보이는 듯한 그 표정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선아 역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 공부로 추정되는 목표를 엄마에 의해 강요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잠깐의 즐거운 시간 뒤로 그녀를 부르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힘을 더한다. 그렇게 두 인물은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상훈에게는 조금 더 중요한 메타포가 놓인다. 자신을 부르는 자동차 경적 소리를 향해 떠나던 선아는 그가 어쩐지 키가 조금 큰 것 같다는 말을 남긴다. 상기된 표정의 상훈은 비장한 표정으로 이제까지 목에 걸고 있던 만보기를 벗어내는데, 여기에는 분명 성장의 은유적 표현이 담겨 있다. 부모가 정해준 목표가 아닌 자신이 설정한 목표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과 동시에 누군가의 품을 벗어나 자신의 세상을 구축하겠다는 삶의 새로운 시작점에 대한 암시다.

영화 <4000BPM>에는 많은 것들이 놓여 있지 않다. 단단히 채워진 이야기는 그 길이나 볼륨과 무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이 증명한다. 상훈의 마지막 표정을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잠시 잊고 살았던 순수했던 날의 때 묻지 않은 감정이 느껴지는 듯하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세이브어스> 스틸컷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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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어스>
한국 / 2023 / 극영화
감독 : 김어진

"동식물 뭐 하나 남김없이 다 지들 뱃속으로 넣고, 숲을 파괴하고 바다를 더럽히고, 우리 소인들은 죽여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는 거인들을 죽이자."

거인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움직임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소인들은 소인거주구역에서만 생활한다. 거인은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다. 완전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더 거주지를 옮겨 다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두려움 없이 길을 걸어 다닐 수 있을지를 매일 걱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거인과 소인이 공존하는 세상이라지만 '공존'이라는 단어 역시 거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일 뿐, 그들은 곧 세상의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다지(이유진 분)는 거인을 죽이고 소인들의 영웅이 되겠다는 큰 꿈을 갖고 있다.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함께할 이들을 구해보지만 소인이 거인을 죽이는 일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계획을 함께하기 위한 모인 소인들은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살자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혼자서라도 거인을 처치하기로 결심한 다지는 작업실에 틀어 박혀 무시무시한 무기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영화 <세이브어스>는 '거인과 소인이 공존하는 세상'이라는 상상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를 화면에 구현하기 위한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카메라의 위치와 거리, 원근감을 활용하는 것이다. 물론 CG를 활용하는 방식에 비해서는 간소하다. 이 간략하고도 소박한 방법은 영화의 후반에 등장하는 다지의 계획과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극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마디로 '입장의 거리'다. 처음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소인과 거인은 같은 사건 하나를 두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

해석의 차이를 이끌어내기 위해 김어진 감독이 활용하는 것은 다지라는 인물의 내면이다. 자연의 보호와 안전한 삶을 위해 거인을 해치우겠다던 그의 다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변질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자신이 완성한 무기가 거인에게 효과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완전히 바뀐다. 소인들의 영웅이 되어 떠받들어지기를 원하고, 진수성찬을 매일같이 맛보고 싶어지고,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물론 뒤틀린 바람과는 별개로 처음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소인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영화가 서로 다른 해석을 보여주기 위해 거인의 시점으로 옮겨가는 과정에는 잔혹한 반전이 놓인다. 소인인 다지의 목적이 변질된 것을 생각하면 징벌적 결말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장면이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거인의 시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제 여기에 소인의 목소리는 닿을 수 없고, 작디작은 존재의 모습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의 뛰어난 상상력과 흥미로운 설정을 고려하면 예상치 못한 묵직한 메시지가 남는 결말이다. 어느 쪽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이브어스'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조금 어지럽힌다. 양쪽 모두를 지켜낼 수 없다면 어느 쪽을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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