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국민 500명의 결정, 국회의원들과 비교해보니 [소셜 코리아]

박정은 2024. 7. 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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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코리아] 국회가 민의를 대변한다는 착각... 의사결정에 시민의 직접 참여 보장해야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박정은]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24시간을 넘긴 가운데 우원식 국회의장이 곽규택 국민의힘 의원에게 토론 마무리를 요구하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단상으로 나와 토론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2017년 당시 문재인 정부는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여부에 대해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향방을 결정짓게 했다. 공론화위원회에서 내리는 권고를 따르겠다고 했다. 시민참여단 470여 명이 집중적으로 학습하고 토론한 끝에, 짓고 있던 원전은 계속 짓더라도 향후 원자력발전은 축소하자는 결론을 도출했다.

정부는 공언했던 대로 이를 수용했다. 당시 정부의 신고리 공론화위원회 권고 수용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었다. 지금껏 시도하지 않았던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정부가 해야 할 정책 결정을 시민에게 위임한 것이라거나, 의회의 논의와 의사결정을 우회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국민을 대표해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이 의회인 만큼 시민 숙의형 공론조사의 결과는 의회의 의사결정을 위한 보완재나 참고자료로만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후 국회가 자청해서 진행했던 두 차례 시민 공론조사 사례를 살펴보자. 21대 국회는 두 가지 중대한 개혁과제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구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것은 공직선거법 개정과 연금개혁에 관한 것이었다. 시민을 대리할 대표자를 어떻게 선출할 것인지, 그리고 연금을 통해 노후 소득을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할 것인지는 시민 모두의 이해가 걸려 있는 사안이었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첨예하여 합의를 이루기 난망한 것들이었다.

시민의 집합적 숙의를 구하려는 국회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위성정당 파동으로 끝난 공직선거법을 다시 손봐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고, 연금개혁특위는 세계 최초로 연금개혁 문제를 두고 공론화를 시도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최소한 시민들의 숙의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존중할 것이라는 기대가 뒤따랐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거대 양당은 시민들의 숙의 결과와는 동떨어진 내용을 두고 협상을 시작했다. 양당은 다시 위성정당을 만들어 총선을 치렀고, 연금개혁안은 납득할 수 없는 여러 핑계와 명분을 앞세운 여당의 손에서 끝내 내쳐졌다.

민의를 대변한다는 기관은 시민들이 숙의해서 도출한 결과를 보완재로 삼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안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기후시민의회 등 유사 활동을 시도한 해외 국가들은 그 결과들을 실제 입법과 정책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을지언정 한국에서처럼 취급하지는 않았다.

소위 시민숙의형 공론조사는 적어도 국회의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논의보다는 신뢰할 만하고 합리적인 것임을 입증해 줬다. 국회의원을 없애든가, 확 줄여야 한다는 식의 정치혐오에 기반한 의견들은 시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숙의와 토론을 보장한다면 유의미하게 개선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국회 정개특위가 진행했던 공론조사 결과 국회의원 정수 확대에 동의하지 않던 압도적인 의견이 숙의과정을 거친 후 대폭 줄어들었고, 지역구보다 비례대표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은 숙의 후에 27%에서 70%로 대폭 늘었다.

한국 사회는 참호전 벌어지는 전장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이 지난 5월 2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시민 공론화 결과에 따른 연금개혁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정민
 
연금고갈론과 미래세대 부담만이 강조되던 연금개혁 논의도 숙의과정을 거친 뒤 달라졌다.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청년세대 역시 노후 보장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고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안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더욱이 시민 공론조사가 국회보다 민의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볼 근거도 없다. 신고리원전, 공직선거법, 연금개혁에 관한 모든 공론조사는 권역별, 성별, 연령별로 모집한 5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학습하고 토론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적어도 중장년 남성들과 관료와 법조계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차지하는 국회보다는 실제 사회에 가까운 인적 구성이다. 다양한 세대와 연령으로 구성된 시민들이 함께 토론해서 도달한 결과는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수용성도 높기 마련이다.

민의를 수렴하는 방식으로 공론조사를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의 제도정치가 고장 났고 의회민주주의도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도와 법의 취지는 오간 데 없이 반칙과 편법이 횡행하는 것이 작금의 정치 현실이다. 대통령이 의회를 통과한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남발하고, 대통령 자신과 부인에게 제기되는 의혹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저지시키는 등 권한 남용에 무감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권의 '행동부대'로 전락한 감사원을 비롯해 국민권익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등 민주화의 산물이자 성취였던 제도들마저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게다가 지금 한국 사회는 참호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다. 승자독식의 제로섬 체제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상대에 대한 적대감은 극대화하고 자제력 없고 분별없는 권한 행사마저 지지받는다. 승자가 되면 누릴 수 있는 권한이니 망가진 체제와 제도를 정상화하거나 개선하는 것이 목표가 되지 않는다. 참담하기 짝이 없는 현 정부가 어찌 퇴출되거나 종료된다고 해도 복수혈전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유다. 이런 시대에 대의민주주의가 과연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체제로 작동할 수 있을까.

제22대 국회가 개원식도 하지 못하고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예상컨대 대결 구도는 더 고착화할 것이다. 정치는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어 외면하고 혐오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참호전이 한창인 저 정치권에 자신들이 민의를 대변하고 우리 사회 난제 해결의 책임이 있다는 오래된 관념 혹은 착각을 버리고,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다시 시민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경제사회적 문제든, 평화와 기후의 문제든 시민의 절박함을 전혀 따라오지 못하는 의회를 대신해 시민의 직접적인 의사결정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시민들이 숙의해서 모은 집합적 의사를 더 이상 참고자료 취급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제도와 입법으로 반영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국회는 몰라도 시민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박정은 /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소셜 코리아 편집위원)
ⓒ 박정은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박정은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소셜 코리아 편집위원입니다. 2000년부터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평화군축, 국제연대 활동에서부터 정치개혁, 검찰개혁 활동, 사회정책 관련 연대 활동 등에 주력했습니다. 2018년부터 4년간 참여연대 사무처장직을 맡았고, 정치개혁공동행동 집행위원장, 시민평화포럼 운영위원장직을 수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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