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련 “여배우에게 햄릿 역할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장지영 2024. 7. 9. 05:3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립극단 ‘햄릿’ 타이틀롤… 2020년 온라인으로만 상영됐지만 백상예술대상 수상
이봉련이 타이틀롤을 맡은 국립극단의 ‘햄릿’. 국립극단

여성 햄릿을 내세운 국립극단의 ‘햄릿’은 당초 2020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 공연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관객과 직접 만나지 못하고 온라인으로만 상영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타이틀롤을 맡았던 배우 이봉련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이듬해 제5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연기상을 받았다.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상영됐던 국립극단의 ‘햄릿’이 지난 5일부터 서울 중구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29일까지)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이봉련은 8일 오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여배우에게 햄릿 역할이 올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면서 “이 작품은 희곡을 읽으며 ‘햄릿은 이래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내 편견을 깨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햄릿을 연기한 건 내 인생의 천운이다”고 소감을 밝혔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이야기의 보편성 덕분에 오늘날까지 끝없이 변주되고 있다. 이번 국립극단의 ‘햄릿’은 지난 연출 의뢰를 받은 부새롬이 햄릿의 성별을 바꿔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뒤 극작가 정진새가 각색하면서 구체화됐다.

국립극단의 ‘햄릿’에서 각색을 맡은 정진새 극작가(왼쪽부터), 햄릿 역의 이봉련, 연출을 맡은 부새롬 연출가가 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립극단

부새롬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오래전에 쓰인 만큼 여성혐오나 여성폄하 등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 부분을 덜어내기 위해 햄릿의 성별을 바꾸게 됐다”면서 “연출을 하려면 나만의 그림이 그려져야 하는데, 왕자 햄릿을 연기하는 여성 배우가 잘 그려지지 않아서 아예 공주 햄릿으로 바꾸는 ‘젠더 밴딩’을 선택했다. 공주로 성별을 바꿔도 충분히 이야기가 될 뿐만 아니라 내겐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고 밝혔다. 이봉련은 “(창작진이) 이번 ‘햄릿’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소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출연 결심을 굳혔었다”고 털어놓았다.

국내에선 젠더프리 캐스팅이란 용어로 통칭하지만, 젠더프리가 원작을 그대로 둔 채 배우의 성별만 바꾼다면 젠더벤딩은 극 중 캐릭터의 성(性)을 아예 바꿔 각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햄릿이 공주로 바뀌면서, 상대역인 오필리어는 남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호레이쇼 등 햄릿의 친구들에도 적절히 여성이 배치됐다.

국립극단의 ‘햄릿’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는 배우 이봉련. 국립극단

정진새는 “관객들이 남성의 얼굴을 한 햄릿은 그동안 많이 봐온 만큼 이젠 다른 얼굴인 여성 햄릿을 보고 싶어 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유행하는 공연계의 젠더프리 캐스팅을 의식해서 단순히 성별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라면서 “각색을 하면서 관객이 억지스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이야기에 개연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공주 햄릿을 통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고 밝혔다.

극중 햄릿 공주는 원작보다 왕권에 대한 욕망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 욕망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고 복수를 하고자 한다. 원작의 우유부단한 햄릿 왕자와 달리 햄릿 공주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거침없이 복수를 준비한다. 여기에 햄릿에게 죽임을 당하는 폴로니우스와 레티어스 부자는 ‘왕가 놈들’이라며 왕족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른 나라의 왕족인 포틴브라스가 새로운 지배자로 오면서 암울한 시절을 암시하며 끝난다. 이런 점에서 국립극단의 ‘햄릿’은 권력 갈등을 강하게 드러내는 정치극, 복수극의 성격이 더 짙어졌다.

정진새는 “원작에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누락됐다고 본다. 바로 ‘햄릿은 어떤 왕이 되고 싶어하는가’라는 것”이라면서 “이번 작품 속에서 햄릿 공주가 해군 장교로 복무하는 등 국가 시스템을 이해하는 지도자를 꿈꾸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국립극단의 ‘햄릿’ 공연장면. 이번 공연에서는 물이 무대의 핵심 요소로 활용된다. 국립극단

이번 공연은 2020년엔 무대 모티브로 ‘흙’이 사용된 것과 달리 ‘물’이 핵심 역할을 한다. 무대 가운데에 고인 물과 천정에서 거세게 내리는 빗속에서 인물들은 사투를 벌이고 죽음을 맞이한다. 부새롬 연출가는 “물이라는 소재를 죽음의 공간으로 해석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한편 올해는 연극 ‘햄릿’이 잇따라 무대에 오른다. 국립극단의 ‘햄릿’에 앞서 지난달 9일 신시컴퍼니의 ‘햄릿’이 홍익대학교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막을 올렸고, 오는 10월에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신유청 연출 ‘햄릿’도 개막한다. 이봉련은 “배우가 이유가 있어서 햄릿을 택한 것처럼, 관객들도 관극할 작품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각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관객이 이쪽 햄릿, 저쪽 햄릿을 보면서 원작인 고전을 다시 읽어주신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