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급발진에 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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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5일자 조간신문 사회면에는 급발진 의심 사고 기사가 작게 실렸다.
서울대 초청특강에 참석하려던 김영란 대법관이 탄 에쿠스 차량이 캠퍼스 내에서 주차 직전 급발진 사고를 일으켜 김 대법관이 경미하게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현행 제조물책임법은 급발진 의심 사고 시 차량 결함에 대한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지도록 하고 있다.
국회도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할 경우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가 차량 결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한 일명 '도현이법'에 대한 논의를 뒤로 미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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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5일자 조간신문 사회면에는 급발진 의심 사고 기사가 작게 실렸다. 서울대 초청특강에 참석하려던 김영란 대법관이 탄 에쿠스 차량이 캠퍼스 내에서 주차 직전 급발진 사고를 일으켜 김 대법관이 경미하게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급발진 차량은 뒤편에 주차된 승용차를 들이받고 5m가량 돌진하다 멈췄다. 운전자는 주차 중 차가 갑자기 뒤로 밀리며 급발진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사고 발생 몇 달 뒤 취재원과 점심을 먹던 중 “현대차가 김 대법관 차를 더 큰 차로 바꿔줬다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현대차가 급발진을 인정할지, 아니면 김 대법관이 현대차를 상대로 급발진 소송을 제기할지 관심이 모아지던 때였다. 기자의 본능이 꿈틀댔다. 며칠 동안 대법원 지하주차장을 뒤져 김 대법관의 에쿠스 관용차가 배기량 3000㏄ 차량에서 3500㏄ 신차로 바뀐 사실을 확인했다. 8월 23일자 국민일보 사회면에는 ‘차 급발진 사고 대법관엔 특혜?’라는 제목의 단독 기사가 실렸다. 현대차는 “사고 차는 리스 차량으로 교체가 필요했는데, 3000㏄가 단종돼 부득이하게 3500㏄ 차량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놨다. 김 대법관도 현대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이 사고는 유야무야 종결됐다. 입사 4년차, 법조를 출입하며 무수히 많은 ‘물(낙종)’을 먹던 시절의 일이다.
문득 20여년 전 에피소드가 떠오른 것은 지난 1일 시청역 인근 차량 역주행 돌진사고를 보면서다. 운전자는 사고 당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딱딱했다며 차량 이상에 따른 급발진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경찰은 운전자 과실에 무게 중심을 두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경찰은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오히려 가속 페달을 강하게 밟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고령의 운전자 과실이라고 무작정 결론 내리기엔 석연치 않은 점도 존재한다. 가해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액셀레이터를 브레이크로 착각할 수 있지만, 수백m 거리를 광란의 질주를 했다고 단정짓기엔 이르다.
2022년 12월 강릉의 한 도로에서 동승한 12살 손자가 숨진 할머니의 급발진 사고(이도현군 사건)도 마찬가지다. 해당 차량은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연기를 내며 달리다가 배수로에 빠졌다. 당시 블랙박스에는 “도현아 도현아 이게(브레이크) 안 돼”라는 절박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2017년부터 한국교통안전공단에 접수된 급발진 신고는 236건인데 이 중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단 1건도 없다. 현행 제조물책임법은 급발진 의심 사고 시 차량 결함에 대한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지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복잡한 자동차의 소프트웨어 결함을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식으로 신고되지 않고 경미한 사고로 끝난 차량 결함 의심 사고는 한해 수백~수천건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제2의 시청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 위한 예방책이 절실하지만 자동차 제조사의 노력은 전무하다. 심지어 헬스클럽의 러닝머신에도 있는 빨간색 스톱 버튼을 자동차에 달지 말란 법도 없는데 말이다. 국회도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할 경우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가 차량 결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한 일명 ‘도현이법’에 대한 논의를 뒤로 미루고 있다.
선진국은 한발 앞서 움직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이달부터 모든 신차에 비상제동과 후진보조장치 등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 장착을 필수화했다. 일본 역시 자동변속기 차량에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 부착을 의무화할 방침이다. 급발진 사고는 순식간에 많은 피해를 발생시킨다. 누구라도 이번과 같은 참담한 사고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무서운 일이다.
이성규 산업1부장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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