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첫발 뗀 ‘느린 학습자’ 지원 정책

2024. 7. 9.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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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당신은 오랜만에 햄버거집에서 주문 중이다.

난생 처음 보는 키오스크 앞에서 다양한 메뉴 중에서 정말 먹고 싶은 햄버거와 새로운 시즈닝 감자튀김에 건강에 좋은 주스를 곁들이려 한다.

장면 #2=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당신은 맛있는 햄버거집 주문 키오스크 앞에 섰다.

낮은 인지 기능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와 생애주기별 지원을 적절히 받지 못하면 느린 학습자는 일상생활 적응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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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일(서울대 교수·한국아동청소년상담학회 회장)


장면 #1= 당신은 오랜만에 햄버거집에서 주문 중이다. 난생 처음 보는 키오스크 앞에서 다양한 메뉴 중에서 정말 먹고 싶은 햄버거와 새로운 시즈닝 감자튀김에 건강에 좋은 주스를 곁들이려 한다. 아뿔싸, 세트 메뉴가 아니어서 처음 보는 아이콘을 잘못 누르고 신용카드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난감하다. 벌써 뒤에서 누군가 구시렁거리고, “집에서 배달이나 해 먹지. 아재가 웬 민폐”라는 불평에 정신이 아득하다. ‘조금만 참아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결국 주문을 포기하고 자리를 피한다.

장면 #2=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당신은 맛있는 햄버거집 주문 키오스크 앞에 섰다. 벌써 여러 사람이 줄을 서 기다리는데 맨 앞에 있는 한 청년이 쩔쩔매며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 줄 선 이들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가고 배고픈 당신도 참을성을 잃을 지경이다. 이때 그 청년이 뒤를 돌아보며 이야기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경계선 지능인입니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이 조용해지고, 몇몇은 다가가 청년의 메뉴 선택을 도와주고 있다.

느린 학습자란 누구인가. 학습 속도가 느리지만 여전히 학습에 대한 열정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학습자를 말한다. 느린 학습자는 경계선 지능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경계선급 지적 기능성(BIF·지능지수 71~84)으로 인한 인지적인 제약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낮은 인지 기능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와 생애주기별 지원을 적절히 받지 못하면 느린 학습자는 일상생활 적응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학업 성취도 어렵고 학교폭력의 피해자이며 가해자화되기 쉽고, 성인기로 연계돼 어려움이 누적된다. 더불어 의사소통 및 사회적 상황판단 능력 부족으로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현재 지적장애에 해당하지 않아 특수교육이나 장애인 고용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교육부는 지난 3일 생애주기별 발굴, 진단, 지원 등을 포함하는 ‘경계선 지능인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이 방안은 느린 학습자에 대한 정부의 첫 종합대책이다. 레이블링 혹은 명칭 붙이기 효과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위기청소년 중에서는 문제아라는 의미만 강하게 드러내는 중퇴·가출 청소년이라는 낙인을 피하고자 ‘학교밖 청소년’ ‘가정밖 청소년’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런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고, 실질적 지원을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더욱 꼼꼼하게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느린 학습자라는 명칭과 ‘느리지만 괜찮아’ ‘배움찬찬이’ ‘자기 속도로 배우는 아이’라는 명명화에 따른 실질적인 지원이 없다면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낙인효과를 우려한 회피, 발견 이후 진단 절차 거부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면 종합대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명확한 법적 근거와 구체적 예산 지원을 바탕으로 조기 개입과 발굴체계 마련, 맞춤형 학업·취업 지원 프로그램 제공, 정부와 민간(기업·공공단체)과의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전방위적 지원 및 사회적 인식 개선이 촘촘하게 추진돼야 한다.

물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한 귀퉁이가 낮으면 물을 더 담을 수 없다는 리비히의 최소 법칙을 다시 돌아본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경계선 지능인과 가족의 축을 제대로 보듬지 못하면 우리 공동체와 국가적 역량은 그만큼 낮아지게 된다. 지난해 10월 국민일보 연재된 ‘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경계인들’ 기획시리즈에서 보듯 실제적 지원에 대한 통찰이 경계선 지능인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가 우리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이끌 것이다. 우리 편견과 사회적 인식의 경계를 넘어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지원의 마중물은 우리 공동체가 성장하기 위한 주춧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김동일(서울대 교수·한국아동청소년상담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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