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내쫓고 '흙수저 청년' 앉혔다…'주류' 진입한 佛극우
프랑스 조기 총선 2차 투표 결과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RN) 진영이 1차 투표 직후 나왔던 예상과 달리 의회 제3당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난 2022년 총선 결과에 비해 약진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8일(현지시간) 개표 결과에 따르면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던 RN은 3위로 내려가고,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이 1위, 극우의 부상을 막기 위해 조기 총선이란 승부수를 던졌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속한 중도파 집권정당 연합은 2위에 올랐다.
RN의 부상을 막기위한 좌파연합과 범여권의 후보 단일화로 예상보다 저조하긴 했지만, 그래도 RN의 의석 수 변화는 괄목상대했다. 직전 총선에서 총 577석 중 89석(15.4%)을 얻었던 RN은 이번 선거에선 143석(24.8%)으로 뛰었다.
정치적 변방에 머물던 RN이 이처럼 프랑스 정치의 주류 세력으로 성장한 데엔 RN의 실질적 지도자인 마린 르펜의 ‘데디아볼리자시옹’(탈악마화·dédiabolisation) 전략 덕분이란 분석이 나온다. 막말을 일삼던 '창업주'를 추방하는 등 지도부를 대거 물갈이하고, 이민자 2세 등 젊은 정치인들을 대거 영입하는 변신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란 평가다.
공수부대원 출신이 창당한 정당
RN은 마린 르펜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이 1972년 창당한 극우정당 ‘국민전선’(Front national‧FN)이 모태다. 프랑스령 알제리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에서 공수부대원으로 복무했던 장마리는 제대 후 프랑스 전역에서 번지던 소상공인 조세저항운동에 투신했고 1956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1972년 FN을 창당하고 반이민, 사형제 재도입을 주장했다. 노동자층의 지지에 힘입어 1986년 35명의 의원을 배출하며 제도권에 진출했지만, 전쟁 범죄를 옹호하거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를 “사소한 일”로 칭하는 등의 과격한 언행으로 반감을 샀다.
200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사회당 출신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를 상대로 깜짝 승리를 거뒀다가, 2차 투표에서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 몰표가 쏟아지면서 역대 최대 표차로 패배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한때 나치의 연설과 군가를 팔기도 했고, 홀로코스트 부정 등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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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이미지 바꾼 탈악마화 정책
‘아스팔트 극우’ 이미지에 갇혀 있던 RN은 장마리의 딸 마린이 2011년 대표로 취임하면서 변했다. 마린은 ‘탈악마화'를 선언하고 기존 지도부를 대거 물갈이했다.
노골적인 반유대주의도 철회했다. 심지어 마린 본인을 비롯한 RN 당원들이 파리에서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행진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대신 “프랑스의 여성, 성소수자, 유대인, 백인 프랑스인이 무슬림 눈치를 보고 살게 됐다”며 반이슬람·반이민으로 당의 ‘전선’을 좁혔고, 이 결과 여성과 성소수자 등 기존 진보층 표밭에서 민심을 얻었다. 이때 당명을 FN에서 RN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장마리와의 갈등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린은 결국 2015년 아버지를 당에서 영구 제명했다. 딸과 의절한 장마리가 “내 딸은 한 나라를 이끌기엔 적합하지 않다”며 반발했지만, RN의 변신은 계속됐다.
동시에 마린은 젊은 피를 수혈하는 데 힘썼다. 각 지역에서 젊은 인재들을 발탁해 중앙 무대로 올려 ‘마린 세대’(Marine generation)라는 우군을 형성했다.
현재 당 대표인 조르당 바르델라 역시 그 중 한명이었다.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바르델라는 16세 때 정치집회에서 마린을 처음 보곤 이튿날 바로 RN에 가입했다. 2015년엔 파리 근교 생드니에서 ‘방리유 파트리오’(Banlieues Patriotes·변두리의 애국자들)라는 단체를 만들어 파리 외곽의 하층민들을 규합했다고 한다. 그런 바르델라를 마린이 한 피자집에서 만나 알아보고 도와달라고 청했다. 2022년엔 아예 당 대표직을 바르델라에게 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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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피,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흙수저
바르델라는 기존 극우의 관점에서 보면 ‘진짜 프랑스인’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에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그가 살던 파리 변두리 생드니의 공동주택단지는 빈민촌의 대명사와도 같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오히려 프랑스 서민들에겐 호감을 샀다.
그 역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하층민 거주지 출신이란 걸 숨기지 않았다. 바르델라 대표가 TV에 등장해 “이 동네(슬럼가)에 사는 많은 가정과 마찬가지로, 저도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봤고, 또한 폭력에 직면했다”고 토로하는 모습에서 프랑스인들은 ‘개천 용’을 봤다고 한다. 동시에 그가 보이는 우아한 태도에 ‘프랑스다움’을 느꼈다고 한다.
마린 역시 “절제되고 똑똑한, 그러면서도 옷차림과 우아함에서는 매우 프랑스적인” 인물이라고 그를 얘기했다. 프랑스 청년들은 소셜미디어(SNS)에 능숙하고,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그와 셀카를 찍기 위해 유세장에 몰려들었다.
여기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실책도 한몫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규제 완화와 법인세 감면, 노동자 해고를 용이하게 하는 노동법 개정 등 친기업 정책을 밀어붙였다. 환경 보호를 명목으로 연료세를 인상해 광범위한 조세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마크롱 대통령의 정책이 ‘차가운 엘리트주의’로 비치면서, 서민·노동자 계층의 반감을 사고 이는 RN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RN “실용주의 노선 걸을 것”
물론 RN이 진정으로 혁신한 것인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널리 퍼져 있다. 급격한 ‘우향우’로 영국과 같은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안팎에서 나온다. 프랑스 언론인 아벨 메스트르는 르몽드에 “마린 르펜의 노선과 사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 역시 “탈악마화는 당의 세계관을 바꾸겠다는 것이 아니라, 언론에 의해 당이 부당하게 ‘악마화’된 당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홍보 정책”이라고 짚었다.
RN도 이런 비판을 의식하고 있다. 마린의 수석 정치 고문이자 바르델라의 홍보전략 책임자인 필립 올리비에 의원은 최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FAZ)과 인터뷰에서 “(각종 현안에 대해) 실용적인 접근을 할 것이고, EU와의 단절을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극우 공약으로 집권했지만 중도 실용으로 노선을 갈아탄 조르지아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를 일종의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얘기다.
박현준 기자 park.hyeon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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