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행복 파괴하기 위해 전 재산 250만 원 쓴 여자
[조영준 기자]
▲ 영화 <복행> 스틸컷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복행>
한국 / 2024 / 극영화
감독: 051,흥
"너희도 나처럼 불행했으면 좋겠어."
빛나(이주영 분)는 지독한 열등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가진 것도 없고 못생긴 데다 앞길도 캄캄한데 뭐가 빛난다고 자신의 이름을 빛나라고 지었는지 모르겠다는 한탄이 삶의 전부다. 아니, 하나가 더 있다. 매주 잊지 않고 구매하는 복권. 벌써 178번째 도전이 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당연하게도 역시 낙첨이다. 매주 휘발하는 현재와 상상 속의 화려한 내일에만 기대는 그녀의 '행복'은 이제 자신의 무엇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다. '행복파괴단'이라는 이상한 단체의 소개가 적힌 전단지를 손에 쥐게 되는 것은 그 무렵이다. 남들의 행복을 대신 파괴해 준다는 이들을 만나게 된 빛나는 이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이라는 단어를 거꾸로 표기한 영화 <복행>의 시작은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이라는 감정이 과연 어디에 놓여 있는가 하는 물음처럼 보인다. 영화는 의미적인 해석은 물론 일반적으로도 개인의 삶이 나아가는 과정과 크고 작은 성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이 감정이 완전히 차단되었을 때를 가정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다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문제가 과연 어디로부터 이 단어를 발현시켜 자신의 품으로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작품을 연출한 051,흥 감독이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를 결코 놓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자신의 성공이 아닌, 타인의 불행을 추구하면서까지도.
전단지 속의 알 수 없는 집단, 행복파괴단을 통해 타인의 행복을 파괴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250만 원이다. 빛나는 마지막 복권이 낙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착수금을 마련한다. 이 금액으로 의뢰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3명. 그는 전에 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SNS를 열어 의뢰를 위해 필요한 이들의 이름을 고르기 시작한다. 자신의 미래가 달려 있는 복권의 번호를 기입할 때보다 더 진지하다. 그녀가 써 내려가는 이름이 평소 알고 지내는 이들의 것인지, 우연하게 알게 된 불특정 다수의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사주에 의해 이유도 알지 못하고 행복을 빼앗기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의뢰를 받은 행복파괴범들은 실제로 그가 지목한 이들을 찾아가 임무를 수행한다. 인물에 따라 그 행복을 파괴하기 위해 시도되는 행위는 모두 다르게 설정되는데, 여기에도 감독의 사회 비판적인 시선은 자리한다. 현대인의 행복이라는 것이 다분히 물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영화적으로는 이들의 범죄가 조금 우스꽝스럽고 유쾌하게 진행될 수 있기는 하지만, 과연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이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자리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게 만든다. 실제로 자신의 삶과 행복이 무너진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과 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전달받고 어느 때보다 행복해하는 빛나의 모습 역시 짙고 긴 여운을 남긴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복권에 당첨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삶은 여전히 전재산을 행복파괴단에 가져다 바치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난 뒤에 빛나가 살아왔을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 이 영화 속의 이야기를 그 삶의 일부, 단편적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면 빛나는 이번에도 역시 자신의 힘으로 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뢰를 하기 위해 저금통을 깬 것과 SNS를 뒤지며 세 사람을 지목한 것 정도는 노력에 해당되지 않는다. 지나온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을 가다듬고 성장시키는 일보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고, 혹은 타인이 망가진 자신과 같은 위치로 떨어지는 모습만 기다리며 만족해 왔을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큰 변화를 경험하거나 계기를 만들지 않는 이상 살아온 모습 그대로 내일 또한 살아가게 된다. 이 작품의 보이지 않는 자리, 서브텍스트의 자리에 여기에 해당하는 맥락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애니메이션 <서클> 스틸컷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서클>
한국 / 2024 / 애니메이션
감독 : 정유미
서클(Circle)은 원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다. 동그라미.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동안에 기본적으로 알게 되는 의미다. 또 하나 다른 뜻이 있다. 사회, 모임과 같은 무리의 의미다. 여기에는 관심이나 직업 등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단순히 여러 사람이 모이기만 해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정유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클>에는 하나의 단어가 가진 두 가지 의미가 양쪽에서 해석되는 짧은 이야기가 놓인다. 눈으로 보이는 쪽에서 하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쪽에서 또 하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한 소녀가 걸어 나와 바닥에 놓인 나뭇가지로 원 하나를 그린다. 다음으로 등장한 남자는 소녀가 그린 원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서류 가방을 바닥에 놓은 뒤에 그 위에 걸터앉아 신문을 읽는다.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여자는 남자 곁의 바닥에 앉아 들고 온 빵을 먹는다. 다음에는 또 한 청년, 그다음에는 여학생, 이제 막 결혼을 한 듯 보이는 신혼부부…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 원 하나는 더 이상의 발을 디딜 틈도 없이 금세 가득 차 버린다. 12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강아지다.
금을 밟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옹기종기 모여 붙은 사람들에게로 처음의 소녀는 다시 돌아와 자신이 그렸던 금을 지우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역순으로 화면을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사람들. 이렇게 설명된 글만 보고 나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영상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녀가 그린 원의 테두리로 인해 제한된 공간 속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은 원의 형태적 의미가 아닌 다른 또 하나의 의미와 접하며 확연히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작은 움직임들을 포착하도록 이끌어낸다.
그 작은 움직임에 해당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수가 늘어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자리와 다음 사람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조금씩 비켜서는 이들의 행동.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처음 가졌던 자리의 크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의 모습. 자신이 향해왔던 하나의 방향을 향해 계속 바라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과 전체의 그런 경향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이와 같은 행동들은 사회 혹은 모임이라는 '서클'이 가진 두 번째 의미를 영상 위로 이끌어낸다.
모든 영화는 각자가 놓인 자리와 경험에 따라 다른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동일한 영상과 내용이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동일한 사람도 어떤 시기에 접하게 되느냐가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면들을 단순히 나열하고, 이 장면들이 화면 위로 단어의 내밀한 의미를 이끌어낸다고만 표현한 이유는 각자가 선택하게 될 자리가 다를 것임이 너무나도 분명해서다. 우리 모두는 하나 이상의 사회와 무리에 속하며 살아가고 있고, 역할과 책임은 다르겠지만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어떤 자리에서 마음이 일으켜지고, 조금 더 눈길이 가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시간들 이후에 영화 속 마지막 장면의 소녀의 행동처럼 모두의 동그라미, 그 경계의 검고 굵은 선 하나를 지워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작은 동그라미 하나가 온 마음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하나 생겨났다 지워졌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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