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모 똥바가지에서 건져 올린 여섯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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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뒤표지에도 있는 이 말은 노작가의 지난날에 대한 겸손한 성찰이며, 또 아무런 방해나 압박감 없이 우주와 텅 빈 일상을 마주하며 한가로이 소요하는 자신의 현재에 대한 허허로운 관조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자기 곁의 일상에 언어의 그물을 던지고, 웃자라지 않은 말들을 골라 문장의 고삐를 너무 바투 잡지도, 너무 헐겁게도 놓아 먹이지도 않는 방식으로 정밀하고 단단한 골격의 글을 쓰는 작가 김훈의 산문집 <허송세월> 이 지난 6월 출간되었다. 허송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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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오 기자]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이 보이는데, 햇볕을 쬐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43쪽
책의 뒤표지에도 있는 이 말은 노작가의 지난날에 대한 겸손한 성찰이며, 또 아무런 방해나 압박감 없이 우주와 텅 빈 일상을 마주하며 한가로이 소요하는 자신의 현재에 대한 허허로운 관조이기도 하다.
▲ 김훈 작가의 신작 <허송세월> 허송세월’이라는 말이 어떻게 윤슬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말로 부활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 나남출판사 |
"나는 말에서 태어난 말을 버리고 사람과 사물에게서 얻은 말을 따라가기에 힘썼다." - 330쪽
"나는 본 것에 의지해서 보지 않고, 말하여진 것에 의지해서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끌고 다니던 말을 버리고 다가오는 말을 맞으려고 애썼다. 나는 이루지 못했고 버리지 못했다." - 331쪽
오랫동안 써온 글이 쌓이면 그 글을 피해 새로운 문장을 쓰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노작가에게 닥치는 가장 어려운 사태는 어쩌면 두텁게 쌓인 자신의 글을 우회하는 '자기 표절'을 벗어나는 일이 아닐까.
작가가 애썼지만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하듯, 끌고 다니던 말과 생각을 버리고 다가오는 새로운 말과 생각을 맞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과제다. 추상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사람과 사물에게서 디테일이 살아있는, 싱싱하게 퍼덕이는 말과 생각을 얻어내는 일은 지난하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으로 무뎌지기 쉬운 일상에 깨어 있는 정신으로 예민한 감성의 더듬이를 세우고, 촘촘한 언어의 그물망을 드리워야 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 발가벗은 일상성에 바탕을 두고, 언어와 삶이 서로 배반하지 않는 세계를 향한 인간의 소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습니다. 그의 말본새는 맑고 단순했는데, 그의 메시지가 인류사에 울리는 강력하고도 생생한 호소력은 이 단순한 어조에 바탕해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 289쪽
발가벗은 일상성, 언어와 삶이 배반하지 않는 세계, 이는 공자에 대한 작가 김훈의 평가이면서 동시에 김훈이 인간으로서, 한 작가로서 지향하는 삶과 글의 목표지점이 아닐까.
<허송세월>은 "핸드폰에 부고(訃告)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는 첫 문장에서 볼 수 있듯, 삶을 구성하고 있는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에 대해, 그것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쓸쓸한 풍경에 대해, 그 속수무책(8쪽)에 대해, 그 발가벗은 일상성에 대해 쓴 글들이 모여 있다.
작가는 또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검증할 수 없는 단어를 배제하다보니 남은 단어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그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가난하면 가난하게 살면 된다고 말한다(39쪽). 또 소통 불가능한 언어가 창궐하는 사회에 대해 말 앞에서의 경건함, 말을 검소히 사용하는 망설임과 진중함, 거들먹거리지 않는 걸음걸이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289쪽).
▲ 철모 똥바가지 김훈은 이 철모 똥바가지에서 생활은 크구나, 여섯 글자를 건져올린다. |
ⓒ 국립민속박물관, 나남출판사 |
"저는 생활을 통과해 나온 사소한 언어로 표현되는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직접성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언어는 훨씬 더 작고 단단하게 영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298쪽
"이 세상에 성과 속의 경계가 어디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여기를 건너뛰어서 저쪽으로 가는 길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그 길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알 바 아니다." - 330쪽
김훈이 주목하고 있는 세계는 생활이고, 바로 여기다. 생활, 여기를 건너뛰어서 저쪽으로 가는 길이 없다고 말한다. 민속박물관에서 6.25 때의 군용철모가 손잡이가 달린 똥바가지로 전시된 것을 보고 작가는 '생활은 크구나'라고 글자 여섯 개를 쓴다.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 그 총탄이 빗발치던 격류의 시대가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한 물결이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밋밋함이 찾아온다. 인간은 그 위에서 또 삶을 이어가야 한다. 크든 작든 또 생활을 영위해가야만 한다. 그러니 쓸모를 다한 군용철모에 손잡이를 달아야 하고 그걸로 똥을 퍼서 채소를 가꿔 밥을 먹어야 한다.
똥바가지가 된 철모처럼 언어도 생활 속에서 작고 단단하게 영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생각은 믿음직하다. 최소한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허위의 말들로 독자들을 현혹하거나 기만하진 않겠구나 하는 믿음이다.
늙은 매화나무 썩은 나무 등걸에서도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듯, 생활에 깊게 뿌리 내리고 사람과 사물에게서 얻은 작고 단단하게 영근 김훈 작가의 말들이 또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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