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오르반의 시간

김철오 2024. 7. 8.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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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오 국제부 차장

트럼프 재선 가능성 높아지고
EU의회 선거 극우정당 득세
유럽, 돌파구 찾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세계에서 가장 기세등등한 지도자는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일 것이다. 유럽연합(EU) 회원국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6개월씩 순회의장국을 맡는데, 올해 하반기 순번은 헝가리에 돌아갔다. EU 의장국은 주요 정책을 추진하고 의사 결정을 주도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2년 넘게 EU 내에서 친러시아 국가로 찍혀 큰소리를 내지 못했던 오르반 총리는 의장국 임기를 시작한 7월 첫 주부터 우크라이나 키이우와 러시아 모스크바로 동분서주하며 ‘휴전의 중재자’를 자청했다.

지금의 오르반 총리 못지않게 기세등등할 다른 국가 정상을 찾는다면 지난 4일(현지시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의 압승을 이끌어 14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고 신임 총리에 오른 키어 스타머, 이튿날 이란 대통령 보궐선거에서 보수 강경파의 우세 전망을 깨고 온건 개혁파 후보로서 당선한 마수드 페제시키안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그들은 곧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에 대비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할 것이다. 제아무리 개혁파라도 이란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는 적일 뿐이다. 맹방인 영국에 들어선 좌파 성향의 노동당 정부도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는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상대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모두 공격 대상일 뿐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미 스타머 총리에게 암묵적인 경고장을 날렸다. 지난 5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서 극우 정당인 영국개혁당의 나이절 패라지 대표의 당선을 축하하면서도 스타머 총리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오르반 총리는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오르반 총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왔다. 지난달 24일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휴전을 주도해야 한다. 모스크바와 키이우에 모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미국 대통령뿐”이라며 “이것이 내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EU 의장국 임기 중 하반기 운영 방향을 설명하면서는 ‘유럽을 다시 위대하게’(Make Europe Great Again·MEGA)라는 구호도 외쳤다. 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6년 대선부터 사용해온 대선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변형한 것이다.

이런 오르반 총리가 지난달 27일 미국 대선 TV토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참패를 지켜봤을 땐 무릎을 치며 기뻐하지 않았을까. 지난달 유럽의회 선거에서 자신과 같은 노선의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마당에 7월부터 EU 의장국 지위까지 얻은 오르반 총리는 이제 주변의 비난을 의식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르반 총리는 지난 2일 키이우에서 만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평화협상에 앞선 휴전 가능성을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거절을 당했다. 사흘 뒤에는 EU 회원국들에 알리지도 않고 모스크바를 찾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났고 “유럽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EU 의장국 자격으로 왔다고 이해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유럽에서 즉각 반발이 나왔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5일 엑스에 “오르반은 헝가리 총리 자격으로 푸틴을 만난 것”이라며 “EU는 러시아의 침략 전쟁을 규탄한다”고 적었다. 이에 헝가리 외무부는 8일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열릴 예정이던 독일과의 양자 외무장관 회담을 불과 사흘 앞두고 돌연 취소하는 강수로 맞받았다. 헝가리 외무부는 “장관의 일정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겨 기술적 사유로 취소했다”고 둘러댔지만, 독일 외무부는 적지 않게 당황했는지 “놀랍게도 취소를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헝가리의 EU 의장국 임기를 시작하고 불과 1주일 만에 벌어진 일들이다. 유럽은 지금의 혼란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김철오 국제부 차장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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