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갑질과 을질의 적대적 공생관계

2024. 7. 8.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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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교(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

곳곳에서 갑질 논란 터지지만
무책임한 을질에 냉소도 커져

둘 다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배려 무시한 내로남불 정신승리

자기 이익만 좇는 ‘개소리꾼’ 막고
객관적 진실 신뢰케 할 제도 필요

최근 충남도의회에서 상정이 보류된 ‘충남교육청 을질 방지 조례안’이 논란이다. 이 조례안은 을질을 정당한 업무지시나 요구 등을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거나, 정당한 지시를 하는 교직원의 행위를 갑질 또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부당하게 함으로써 상대방(갑)에게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이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충남교육청은 ‘출근은 내맘, 퇴근은 칼’ ‘상사는 직원을 귀찮게 해!’ ‘내 일은 남 일, 남 일은 남 일’ ‘기한은 있으나 마나’ 등을 ‘을의 갑질(역갑질)’ 유형으로 들었다. 전교조 등 진보단체는 “이 조례안은 을의 지위에 있는 노동자들을 입틀막하고 갑질을 보호한다”며 완전 폐기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대목에서 요즘 유행어인 ‘제가요? 이걸요? 왜요?’가 떠오른다. 이 ‘3요’는 꼰대 상급자의 갑질에 대한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동시에 무책임한 하급자의 을질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소다. 곳곳에서 갑질 논란이 불거지는 게 일상이 됐다면 이제 을질 논란도 만만치 않다. 갑질과 을질은 권력과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된 불공정한 행태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갑질은 주로 직장 내 상사와 부하 직원,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 등 권력 관계가 명확할 때 나타난다. 그 관계를 뒤집어 을의 탈을 쓰고 갑에게 누명을 씌워 괴롭히면 을질이 된다.

‘을의 가면’의 저자 서유정은 진짜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합의금을 제안해도 가해자와 관련된 돈조차 거부하거나, 받기를 결심해도 가해자의 이름이 자신의 계좌에 찍히는 것조차 싫어 본인이 선택한 다른 기관에 기부할 것을 요구한다고 전한다. 반면 을의 탈을 쓰고 을질을 하는 이들은 과도한 배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이 시대의 갑질 문화는 을질 문화라는 새로운 괴물을 잉태했다. 갑질을 일삼는 자들의 가장 큰 동조자는 갑질 앞에서 냉소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들이다. 반대로 을질을 일삼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피해자 코스프레다. 종종 2차 가해 프레임도 한 세트가 된다. 액면만 놓고 보면 갑질과 을질은 서로 적대적이지만 실제로는 묘하게 공생한다. 갑질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커질수록 을질은 번창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갑질하던 사람일수록 을이 되면 을질을 하고, 을질하던 사람일수록 갑이 되면 갑질을 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두 개 이상의 양자가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상태를 직접 관측하기 전까지 각 양자의 위치와 속도는 다양한 가능성의 중첩 상태에 놓여 있다. 마찬가지로 사건이 터져 실제 관찰이 이뤄지기 전까지 갑질과 을질은 확률적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최근 또 다른 논란이 된 유소년 얼차려 훈련방식이나 피해 학생 부모의 과도한 합의금 요구에 갑질과 을질이 중첩돼 있다.

갑질이든 을질이든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없는 내로남불의 정신 승리다. 그래서 진정으로 갑질이나 을질이 있었는지 밝히기 어렵다. ‘모두 거짓말을 한다’의 저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사람들의 진심을 그렇게 알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구글 트렌드 분석을 통해 밝혀낸다. 객관적 사실을 놓고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과 진술만 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라쇼몽 효과’라고 한다. 한 사무라이의 죽음을 둘러싼 네 명의 진술이 모두 엇갈리는 상황을 풍자한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작 영화 ‘라쇼몽’에서 유래됐다.

갑질과 을질에 대한 당대 최고의 일갈은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다. 이 책의 저자 해리 프랭크퍼트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는 개소리꾼은 진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 따라 개소리를 지껄일 뿐이라고 꾸짖는다. 그는 단순한 거짓말보다 개소리가 더 해롭다고 본다. “우리가 객관적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방법이 있다”는 믿음과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무너트리기 때문이다.

2019년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갑질에 새로운 법적 지위를 부여했듯, 사회의 통념이 허락하는 범위 밖의 이익을 얻기 위해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을질에도 법적 지위를 부여할 때가 됐다.

구민교(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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