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살려주세요" 울던 6살 꼬마에 총 들이댄 경찰 [박만순의 기억전쟁2]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조선으로 피난 가게 얼릉 짐 싸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밖에 나갔다 온 남편이 뜬금없이 피난 짐을 싸라고 하자 고삼순은 어리둥절했다. 더군다나 가까운 곳도 아니고 조선으로 간다니 말이다.
"조만간 미군이 오사카에 대형폭탄을 터뜨린다는 말이 있소."
"대형폭탄이 뭔데요?"
대형폭탄이 뭐냐는 아내의 물음에 정재현은 할 말이 없었다. 자기도 시내에 나가 오사카에 대공습이 있을 거라는 얘기만 들었기 때문이다. 고삼순은 대형폭탄이라는 말에 몸서리를 쳤다.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 4개월 전에 도쿄에 대공습이 있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1945년 3월 9일부터 10일까지 대량의 네이팜탄을 이용해 도쿄에 전략폭격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시민 약 8만8000명이 사망하고 가옥 26만7000채가 파괴됐으며, 100만 명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 1945년 3월 10일 미군의 공습 직후 상공에서 촬영한 일본 도쿄의 모습. ( Japan Air Raids.org 소장 자료 ). |
ⓒ 미국 육군공군 |
원폭 피해 조선으로
당시 일본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 지도자들도 원자폭탄의 엄청난 살상력을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도쿄대공습 때보다 더 어마어마한 공습이 있을 거라는 소문만 요란했다.
그렇다면 폭격대상은 어느 곳이 될까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론적으로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지만 미군은 사전에 연막작전을 펼쳤다. 그렇게 해서 오사카가 폭격대상의 한 곳으로 지칭된 것이다.
만약 오사카에 대폭격이 있게 되면 인접해 있는 교토 역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랬기에 도쿄부 중경구 니시노쿄에 살고 있던 정재현은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그는 일본 내에서 피난 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 도쿄대공습을 경험했기에, 일본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피난 짐을 싸는 고삼순의 속은 썩어 문들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과 함께 현해탄을 건넌 것이 20년이나 됐다. 생계를 위해 안 한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직장을 다니고 자영업을 했다. 고생 끝에 자식 6남매 중 첫째, 둘째, 셋째는 각각 고등학교와 중학교, 소학교에 다니게 됐다.
남편은 똑똑하고 성실하다는 평을 받아 조선인들이 밀집해 사는 마을에서 촌장을 맡았다. 일본에서의 삶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쟁과 피난이라니 황망하기만 했다.
이런 아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재현은 "여보. 한두 달만 조선에 갔다 올 테니 살림은 일절 챙기지 마소"라고 했다. 그렇게 자식 6남매와 함께 정재현 부부가 여수를 경유해 전남 영광군 묘량면 삼효리 본가에 도착한 것은 1945년 7월 28일이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정재현은 귀국 이듬해인 1946년에 삼효리 효동마을 이장을 맡게 됐다. 피난차 왔던 고향에서도 몸 편히 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마을 대소사를 맡아 정신없이 바쁜 것이 아니라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기에 마을 이장을 맡게 된 것이 문제였다.
1948년 4월,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제주 4.3항쟁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에 제주항쟁 진압을 위해 파병을 지시했다. 하지만 제14연대 군인들은 "같은 동포에게 총구를 돌릴 수 없다"며 파병을 거부했다. 이른바 여순사건, 여순항쟁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여순항쟁은 오래지 않아 정부군에 의해 진압됐고, 항쟁에 참여한 군인과 민간인 일부는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 투쟁을 하게 됐다. 영광과 함평에 걸쳐 있는 불갑산과 영광 대마면과 장성에 걸쳐 있는 태청산에서도 빨치산이 주둔하며 유격 투쟁을 벌이게 된다.
1948년 11월부터 한국전쟁기까지 빨치산과 대한민국 군경 사이에 한 치의 양보 없는 전투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 경상도 산간지대에서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돌았다.
영광군 묘량면 삼효리 효동마을도 마찬가지였다. 간혹가다가 야심한 밤에 불갑산과 태청산, 장암산에 주둔하던 빨치산이 내려왔다. 일명 보급 투쟁으로 주민들에게서 식량을 획득(?)하는 활동이었다.
1949년 추석을 10여 일 앞둔 그 날도 밤손님(빨치산)이 내려왔다. 그들은 마을 이장인 정재현 집으로 와 '쌀을 내놓으라'고 했다. 정재현이 없다고 하니, 대장 격인 사람이 들고 있던 칼을 손수건으로 씻으며 "내일까지 닭과 쌀을 준비해 놓으시오"라고 했다.
▲ 증언자 정유송씨. |
ⓒ 박만순 |
총칼 앞에 '나 몰라라'며 뻗댈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 법이다. 시퍼런 칼날 앞에 오금이 저리던 정재현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눈만 껌벅였다. 다음날 아침에 귀신같이 경찰이 반상회를 하던 하동양반 사랑방에 들이닥쳤다. "어제 이 마을에 공비(빨치산)들 왔었지?"
빨치산이 왔던 것을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받는 시국이라 정재현(당시 54세)은 "그런 일 없다"며 잡아뗐다. 하지만 경찰은 마을에 심어 논 밀대(밀정, 스파이)를 통해 전날 빨치산이 마을에 내려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광경찰서 소속 최아무개와 묘량지서 조아무개 경찰은 정재현을 마을 어귀의 주막집으로 끌고 갔다. 경찰은 심문이나 조서 작성은 고사하고 참나무 몽둥이로 정재현을 두드려 팼다. 허벅지와 엉덩이는 터졌고, 얼굴은 퉁퉁 붓고 피투성이가 됐다. 어느 누구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시 경찰은 염라대왕보다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경찰이 피투성이가 된 남편을 어딘가로 끌고 가자 몰래 뒤따르던 아내 고삼순은 경찰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제발 살려주시오." 엄마를 따라간 정유송(당시 6세)은 악을 써가며 울어댔다. 경찰이 정유송에게 총을 들이댔다. "야 꼬맹아.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집으로 꺼져!" 경찰이 막내에게까지 총을 들이대자 경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던 고삼순은 너무나 쉽게 허물어졌다.
고삼순 모자가 발길을 돌린 후 얼마 안 돼 솔갓재에서 '탕탕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엄마를 따라 솔갓재로 간 정유송은 아버지가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고삼순은 치마를 찢어 남편의 목을 감쌌다. 하지만 총알이 박힌 목구멍에서는 피가 쿨럭쿨럭 쏟아졌다. 집안사람들이 담가(擔架, 환자나 물건을 실어 나르는 기구)로 정재현을 집으로 옮겼지만 여섯 아이의 아버지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1949년 9월 25일이었다.
수난은 계속되고
정재현이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삼효리의 비극이 끝난 건 아니었다. 솔갓재에서 총소리가 울린 지 3일이 지난 1949년 9월 28일 방곡재에서 또 한 사람이 저세상 사람이 돼야 했다. 효동마을에서 반장을 맡고 있던 정복남(당시 38세)은 빨치산에게 밥을 해줬다는 혐의로 영광경찰서로 붙잡혀갔다.
그는 영광경찰서에 구금돼 있는 며칠 동안 갖은 고문을 받았다. 특히 전기고문을 당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9월 28일 방곡재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경찰이 조준 사격한 총알이 정복남의 이마를 관통해 하얀 골이 나왔다(진실화해위원회, <영광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2010).
정복남이 경찰에 연행된 후 정재현과 같은 마을 이아무개가 연행됐는데, 정재현은 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솔갓재에서 불법 학살당했고, 이아무개는 집안사람이 경찰서에 돈을 갖다줘 풀려났다. 이아무개는 정복남이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해 방곡재에서 죽임을 당한 사실을 그의 가족에게 알려줬다.
솔갓재와 방곡재의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효동마을의 비극은 재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해 늦가을이었다. 인공시절 감투 썼던 이들이 UN군의 수복으로 불갑산 등지로 후퇴한 때였다. 상황은 전쟁 전과 비슷했다. 산간지역 주민들은 밤에는 빨치산에게 시달리고, 다음날 낮에는 경찰에게 시달렸다.
빨치산들이 내려와 밥을 얻어먹고 간 다음날 새벽이었다. 밀대의 신고로 긴급출동한 영광경찰서 경찰들이 정유송의 큰아버지 집을 포위했다. 경찰들은 집을 불태워 버렸고, 마을 주민 누구도 불 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후에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경찰은 마을 주민들을 정자 앞으로 모이게 해 2열 종대로 세웠다. 대부분 가족끼리 마주 보게 됐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그런 경우이다. 경찰들은 마주 보고 있는 이들의 뺨을 때리게 했다. 어찌 시아버지의 뺨을 때릴 수 있는가! 땅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던 여성에게 다가간 경찰이 뺨따귀를 사정없이 때렸다.
경찰은 쓰러진 여성을 일으켜 세우더니 줄기차게 뺨따귀를 때렸다. 보다 못한 시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가. 제발 나를 때려 다오." 학살과 죽음보다 더 잔인한 고통의 제전(祭典)이 벌어진 것이다. 킥킥거리며 제전을 바라보던 경찰은 끝내 마을 이장과 반장을 공개 처형했다. 1년 전에 죽임을 당한 정재현과 정복남의 후임자들이었다.
▲ 전남 영광군 우산근린공원 내에 있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위령탑'. |
ⓒ 박만순 |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활동이 활발했던 전남 영광군 곳곳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작은 전쟁'(Little War)이 시작됐다.
1948년 6월 28일 영광군 백수면 하사리에 거주하던 민족청년단 단장 강근배의 집에 괴한 20여 명이 침입했는데, 강근배가 외출하고 집에 없자 그의 부친 강대조(당시 54세)를 일본도로 살해했다. 이들은 다시 인근의 상사리로 이동해 역시 민족청년단 단장 장세환의 집을 습격했으나, 그도 집에 없자 가족을 협박하여 현금과 의류 등을 강탈하고 집에 방화한 뒤 도주했다(박찬승, <혼돈의 지역사회 하>, 2023에서 재인용).
빨치산이 제헌의회 선거에 협조한 우익인사를 살해한 것이다. 대한민국 군경은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산간지역 주민들을 합법적인 절차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피의 제전'은 영광군 곳곳에서 벌어졌다. 특히 영광경찰이 1949년 9월 법성면에서 자행한 학살이 대표적인 경우다.
법성지서 경찰들은 법성면 진내리 청년 33명을 연행해 영광경찰서에 10여 일간 구금한 후 전북 고창군 부곡재 마당바위로 끌고 가 집단학살했다. 죽임을 당한 이 중에는 1937년 9월 일제경찰이 조작한 '영광체육단'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구체적인 혐의와 증거도 없이 젊은이 33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반인권행위이자 전쟁범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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