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만행 폭로 후 사형당한 남편... 남겨진 그녀의 싸움
[김성호 기자]
▲ <법정에 선 에스더> 스틸컷 |
ⓒ SIEFF |
쉘은 지난 1936년, 역시 영국에 본사를 둔 BP(British Petroleum)과 니제르델타 일대 탐사 목적의 벤처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20년 만에 첫 유정에서 원유 시추에 성공했다. 다시 20여 년 뒤 쉘은 BP의 지분을 모두 사들여 니제르 델타 에너지 사업, 즉 원유 시추를 주도하게 된다.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나이지리아 석유 매장량은 370억 배럴 이상으로 추정된다. 매장량만 해도 세계 10위권이고, 국내총생산(GDP) 기준 나이지리아 경제의 5% 이상을 석유산업이 차지할 만큼 핵심 산업으로 평가된다. 1960년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이래 40년 가까이 독재와 군부쿠데타를 겪어온 나이지리아다. 석유는 불안정한 정부가 안정적으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산업으로, 쉘은 언제나 정부의 확고부동한 파트너 역할을 수행해왔다.
문제는 쉘의 시추작업이 순조롭기만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보고된 것만 3000여 차례에 이르는 석유누출 사고, 그로 인한 환경파괴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오고니9(Ogoni 9)'이라 불리는 오고니족 활동가 9명의 처형 사건은 쉘의 무리한 석유시추가 불러온 끔찍한 참사였다. 쉘의 무리한 석유시추와 환경파괴를 폭로한 활동가와 교수들이 군사법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집행은 선고 불과 이틀 뒤 원유수출항인 포트하코트(Port Harcourt)에서 이뤄졌다.
오고니족의 저항은 군사독재 세력에게 꽤나 큰 부담이었음이 분명하다. 쉘의 송유관 공사를 가로막고 오고니족 주민을 결집해 시위에 나섰기 때문이다. 자원으로 인한 수익이 외국기업과 독재정권이 아닌 주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당시 오고니족 인구의 절반 가량인 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할 만큼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바리넴 키오벨은 이 사태로 목숨을 잃은 오고니9 중 하나다. 정부 관료로 쉘과 정부, 오고니 족 사람들 사이의 협상과 중재를 맡았다는 바리넴이다. 아내 에스더는 남편이 쉘로부터 지역 관리자 등의 제안을 받았으나 거부했다고 말한다. 자국민을 배신하지 않고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고니9의 일원으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것이었다.
사법살인 당한 남편... 호화 변호인단과 맞서다
제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지구 비상' 섹션 가운데 <법정에 선 에스더>를 초청해 소개했다. 네덜란드 탐사 저널리스트 타티아나 스헬테마의 작품으로, 헤이그 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쉘의 오고니9 사망 책임을 묻는 재판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72분의 다큐는 바리넴의 아내 에스더 등이 원고가 돼 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모습을, 조국 나이지리아를 찾아 당시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을 구하는 과정을 담았다.
헤이그 법원은 지난 2021년 쉘에게 2030년까지 2019년 대비 탄소배출량을 45%까지 감출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상 처음으로 개별기업에게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물은 것으로, 환경 변호사로 명성을 얻은 로저 콕스가 수행한 재판의 결과였다.
이는 2015년 파리협약 이후 전 세계에서 폭증하고 있는 수천 건의 환경소송 가운데서도 단연 특별한 재판이었는데, 다국적 에너지기업인 쉘이 환경파괴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 재판에 세계적 관심이 쏠린 건 자연스런 일이다.
같은 법원에서 동일한 기업을 상대로 한 재판이란 점에서 에스더의 소송 또한 큰 관심을 모았다. 쉘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인 니제르델타에서의 흑역사란 점에서도 그랬다. 쉘이 오고니9의 사법살인에 개입된 정황이, 적어도 사법적 책임이 인정된다면 다국적 사업을 진행 중인 이 업체의 윤리적 정당성에 심각한 물음이 떠오를 게 분명했다.
쉘은 언제나처럼 호화 변호인단을 꾸려 법정 싸움에 나선다. 바리넴 등 오고니9에 접촉하지 않았고, 그들을 매수하려 했다는 증거 또한 없다는 게 핵심 근거가 된다. 에스더 측 증인들이 쉘의 대리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등의 증언을 내놓지만 대리인의 이름을 비롯해 구체적 정황까진 떠올리진 못한다.
일진일퇴의 공방 가운데서 에스더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상대 변호사들, 수십 년 전 제 남편이 처형되던 날을 전혀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의 멀끔한 변호사가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늘어놓는다고 느껴서다. 그녀는 그 변호사가 악마라고 비난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변호사의 당연한 업이라고 믿는 이가 얼마든지 있는 세상이 아닌가.
<법정에 선 에스더>는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 출품된 다른 법정영화와 달리 통쾌한 승리를 그리지 않는다. 에스더는 패하고 소송을 낸 이들은 실망한다. 쉘은 오고니9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고니9의 사법살인뿐 아니라 나이지리아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이어진 환경파괴와 독재정권과의 결탁 등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 영화 상영을 얼마 앞둔 시기, 나이지리아에서의 석유 시추 운영을 완전히 접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거듭되는 다국적 기업 주도 에너지 사업
쉘의 사례는 유럽 등 다국적 자본에 근거한 에너지 기업이 아프리카에서 벌이는 석유시추 사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쉘과 함께 6개 오일 메이저 중 하나로 꼽히는 토탈에너지는 우간다에서 하루 20만 배럴의 원유를 뽑아 올리는 틸렝가 이코프(Tilenga Eacop) 사업을 진행 중이다. 사업엔 원유생산뿐 아니라 시추장소인 우간다 내륙으로부터 탄자니아의 항구까지 무려 1445km의 송유관을 설치해 원유를 옮기는 작업도 포함돼 있다.
송유관이 지나는 길엔 각종 멸종위기동물이 사는 생태공원이 있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사는 마을도 있다. 그러나 토탈에너지로부터 막대한 부를 보장받은 우간다 정부는 반강제적으로 토지를 수용하고 공원 가운데 길을 낸다. 오고니9의 비극이 얼마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기름유출과 고온 송유관의 설치, 뚫린 길과 토지수용 등은 동물과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릴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시추와 원유 반출로 얻은 부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초국적 기업과 아마도 선진국에 살고 있을 자본가들, 또 현지의 독재자에게 돌아갈 테다. 한 세기 동안 반복돼 온 자본의 에너지 착취,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선수들만 바꿔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를 그를 멈춰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그 고함은 이내 사라져 들리지 않는다.
막대한 에너지수입국인 한국에서 우리가 쓰는 에너지의 부조리함이, 그 생산부터 운송 사이 깃든 온갖 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민망하기까지 한 이야기다. 그리하여 우리는 적어도 <법정에 선 에스더>와 같은 작품을 봐야만 한다. 이 영화가 던진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쓰는 석유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예멘 난민의 고통 앞에서 그들을 비난하고 모욕했던 참담함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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