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화에 나랏돈 94조를 쓴다…괴물이 된 부동산 PF[송승섭의 금융라이트]
선진국은 PF도 자기자본 평가하는데
한국은 보증만 서면 무분별하게 대출
침체→건설사 부도→금융권 파산 고리
"이런 구조는 시스템 리스크 초래해"
정부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 안정화에 94조원의 돈을 쓴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정부가 지난 3일 ‘2024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밝힌 내용인데요. 부동산 PF의 불안이 금융시장 전반으로 퍼지지 않도록 직접적인 보증에만 30조원을 투입합니다. 이 밖에도 건설공제조합 보증에 10조원, 준공 전 미분양 대출보증 5조원 등이 소요됩니다. PF 시장이 대체 어떻게 됐길래 안정화에 막대한 국민 세금을 투입하는 지경이 됐을까요?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구체적인 정의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설명하는 방법이 제각각이고, 용어의 범위도 느슨하죠. 다양한 종류의 PF가 있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담보 없이 자금을 빌려준다’는 겁니다. 뭘 믿고 돈을 빌려주냐고요? 프로젝트를 봅니다. 건설이든 사업이든 미래에 어떤 프로젝트를 해서 돈을 벌 것인지 따지는 거죠. 만약 충분히 유망한 프로젝트라고 판단하면, 비록 담보는 없지만 미래에 돈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돈을 빌려줍니다.
원시적인 PF의 시초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299년 영국 왕실에서는 은행을 소유한 이탈리아 상인 프레스코발디에게 영국 데본 지역의 은광개발과 탐사자금을 빌려줬습니다. 대신 개발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광산의 생산물로 상환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죠. 담보는 없었지만 미래의 프로젝트가 성공할 것으로 보고 자금을 지원한 일종의 PF인 거죠. ‘대항해시대’로 불리는 17세기에도 PF는 유용했습니다. 돈이 많은 투자자들이나 은행은 항해와 무역 탐사를 위한 자금을 대고, 화물선이 돌아오면 수익금을 챙기는 방식으로 돈을 불렸죠.
현대적인 의미의 PF가 널리 퍼진 건 20세기 초 무렵 미국에서죠. 특히 1970년대 이후 석유와 가스산업에서 PF 방식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석유나 가스 등의 에너지 채굴 프로젝트는 성공할 경우 엄청난 부를 획득하지만, 막대한 초기 비용이 듭니다. 과거 전통적인 방식의 금융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었지만, 기업들은 PF를 이용해 미래에 생길 막대한 현금흐름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었죠. 알래스카 횡단 파이프라인 건설과 북해 유전 탐사와 개발도 PF 덕분에 사업이 가능했습니다.
외환위기로 시작된 한국만의 요상한 PF
한국은 어떨까요? 사실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PF는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도 각종 토목·건설 공사가 활발히 이뤄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공사와 시행사로 업무 역할이 나뉘진 않았습니다. 건설회사가 자금 확보부터 실제 공사까지, 사실상 모든 개발업무를 도맡아 했죠. 공사에 필요한 돈은 건설회사가 채권을 찍어내든 알아서 조달했고, PF 방식이 일반적이진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PF가 도입된 계기는 외환위기 사태입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등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들이 도산했습니다. 건설에 많은 돈을 주고받았던 건설사와 은행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러자 부동산 업계에 개발사업과 분야시장의 리스크를 분리하기 위한 시행사 제도가 나타났습니다. 건설은 시공사가 진행하되 토지와 설계매입, 분양 등의 전반 과정은 시행사가 하는 지금의 방식이 안착했죠.
돈은 시행사가 빌리기 때문에 건설사들은 부채비율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단 문제가 있었죠. 시행사가 돈을 빌려야 하는데 기존의 방법으로는 큰 자금을 동원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건설사처럼 규모가 큰 것도 아니었고 담보로 맡길만한 물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PF 방식이 채택됐습니다. 비록 담보력이 약하긴 하지만 건물을 짓고 분양해 만든 수익으로 돈을 상환하는 식으로요. 법도 은행이 부동산 매입과 개발에 자금을 투입할 수 있도록 바뀌면서 PF는 일반적인 금융제도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PF 도입 초기만 해도 한국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부동산 시장은 실패하려야 실패할 수 없는 사업처럼 여겨졌거든요. 건물은 완공 되는 대로 빠르게 팔려나갔고, 매년 집값은 오르기 바빴습니다. 대형은행들도 PF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건설뿐 아니라 개발이 유망한 프로젝트에서 높은 수익을 올리는 수단 중 하나였거든요. 실제 하나은행의 수장이었던 김승유 행장은 1997년 “벤처기업 등 개발 유망 분야에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형식으로 무담보 신용대출을 늘려나갈 방침”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죠.
하지만 한국의 PF는 선진국과 달리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래 PF는 사업의 프로젝트를 따져 돈을 빌려주는 제도지만, 금융사들은 부동산 개발 때 시공사의 연대보증이나 책임준공약정을 요구했죠. 시행사가 자기자본이 매우 부족하니 사업위험을 건설사와 나뉘 가지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시행사들은 부동산 초기 개발단계에서 저축은행같은 2금융권에서 단기자금을 빌렸다가, 사업 인허가가 떨어지면 이를 근거로 1금융권에서 저금리에 돈을 빌려 대출을 갈아타는 방법을 선택했고요.
'경기침체 때 다같이 망한다'…위험노출액 135조
독특한 한국만의 PF는 연쇄도산이라는 무시무시한 약점이 있었습니다. 시공사도 개발사업 리스크를 크게 부담하기 때문에 경기침체가 이뤄지면 시행사→시공사→다른 사업장 부도→금융권 부도로 이어질 수 있었거든요. 이런 약점은 2008년 금융위기 때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부동산 침체가 시작되자 시행사가 무너지고 중견 건설사 20여 곳도 부도 처리됐습니다. 이들에게 돈을 빌려줬던 저축은행들도 파산해버렸고요. 이때 PF 대출 잔액이 76조5000억원이었는데 저축은행이 빌려준 돈만 11조5000억원에 달했습니다.
저축은행 사태의 여파와 오랜 기간 이어졌던 부동산 시장의 침체로 잠잠하던 PF는 2015년 다시 부동산 시장이 뛰기 시작하면서 기지개를 켰습니다. 특히 증권회사들이 PF 시장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사업자금구조를 설계하거나, PF 채권을 유동화하거나, 미분양담보대출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했죠. 그렇게 PF 대출잔액은 꾸준히 늘어 2023년 135조6000억원에 이르게 됐습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증권업계가 감당해야 할 국내·외 부동산 금융 위험노출액이 10조3000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 PF 시장은 또 위험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PF 대출에 참여했던 금융기관과 건설업계가 동시에 부실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가 각종 보고서에서 끊이질 않고 있죠. 특히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새마을금고는 많은 부동산 PF 대출을 시행해준 탓에 최근 연체율까지 치솟은 상태죠. 지난해 7월에는 남양주동부새마을금고가 600억원대 부실 PF를 해결하지 못해 합병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 달간 17조원이 빠져나가는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까지 발생했고요.
한국의 금융권과 부동산 개발업계는 과거 PF 위기를 겪었음에도 똑같은 문제를 반복했는데요. 전문가들은 저자본·고보증 구조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적어도 자기자본으로 토지를 확보하고 공사비 정도만 PF로 대출받기 때문에 위험이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자본이 거의 없는 시행사들이 소위 ‘한탕’을 노리고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높은 수익과 안전함을 동시에 챙기고 싶었던 은행들은 건설사, 신탁사, 증권사에 각종 보증을 요구했고요. 어차피 시행사가 무너져도 각종 보증이 있으니 은행들은 사업성 평가를 제대로 할 유인이 없었습니다. 금융사들은 PF 대출을 최대한 많이 내주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고작 십수 년 만에 한국이 다시 PF 위기에 부닥친 이유죠.
PF 대출 위기에 따른 리스크는 국민이 부담하게 됐습니다. 부동산 업계와 금융권의 무분별한 사업으로 애꿎은 세금을 투입해 안정화를 도모해야 하는 실정이죠. 황순주 한국개발연구원(KDI) 금융혁신연구팀장은 “저자본·고보증 구조는 사업성 평가 부실, 묻지마 투자, 거시변동성 확대를 통해 결국 시스템 리스크를 초래하면서 위험을 사회화한다”면서 “시스템리스크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는 불가피하게 PF대출을 보증하고 긴급유동성을 지원하는 등 직간접적인 공적자금을 사용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세종=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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