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세부터 다시 10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해마다 8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회적 정년을 맞아 은퇴한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먹고 살기 위해 다시 노동시장으로 회귀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 은퇴 나이는 72.3세다. 정년은 비자발적 실업이며 경력 단절일 따름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늦은 나이까지 일하는 나라다. 우리 시대의 은퇴란 무엇인가. 생애 후반부는 어떤 모양으로 조각해야 하나. 인생 곡선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이글은 퇴직과 정년, 은퇴와 수명이라는 변곡점을 통과하는 중년/장년/노년의 고령자들이 좋은 삶(good life)을 살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기자말>
[문진수 기자]
많은 사람이 종 모양의 포물선을 인생 곡선(life cycle)이라고 생각한다.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 혹은 봄부터 겨울까지의 계절 변화를 삶에 대입해서 바라보는 탓이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꼬리가 길어지고 있지만, 모양은 그대로다. 인생에는 하나의 봉우리만 존재한다는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이 궤적을 따라가면, 정년과 은퇴는 삶의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변곡점'이 된다.
전반부에 쌓은 재산으로 후반부를 살아내야 하는 이에게 정년과 은퇴라는 관문은 공포로 다가선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퇴물이 되어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날 것이기 때문이다. 밀림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버터야 한다. 일자리의 질과 무관하게 한 푼이라고 더 벌기 위해 수많은 장년층이 노동시장에 머무는 이유다. 정년이 몇 년 더 늘어난다고 해도 이 추세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 생애주기 곡선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정년이 없고, 급여 생활자보다 소득이 높아서다. 진입장벽이 높을수록 더 유리하다. 대표적인 직업이 의사다. 의사는 돈과 명예가 같이 따라오고, 연륜이 쌓일수록 후한 평가를 받는다. 젊은이들이 진로를 변경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의대에 진학하려는 이유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짧았던 시절에는 전문직 종사자와 급여 생활자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정년과 은퇴, 수명의 간격이 무척 짧았기 때문에 늦은 나이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정년에서 수명까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100세 시대가 열리면 정년(60세) 이후 무려 40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
생애 소득(lifetime income) 관점에서 이 주제를 해석하면, 경제 활동기간 동안 번 돈으로 정년 후의 긴 꼬리를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 사회의 '다수'인 정년제 급여 생활자는 이제 적자 인생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 주제는 '성공하려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 따위의 금언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간단한 해결법이 있다. 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정년을 뒤로 미루면 된다.
하지만 이 방안이 실현될 가능성은 '영'에 가깝다.
고용주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정년제는 산업 혁명이 낳은 산물이다.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 대표되는 산업 혁명은 표준화된 노동이 필요했고, 공장주들은 느려 터진 늙은이보다 작업 속도가 빠른 젊은이를 고용하고 싶어 했다. 늙은 노동자를 공장에서 쫓아낼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자본가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보따리를 싸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렇게 창안된 것이 정년제다.
정년 연장 이야기가 나오면, 인건비 부담을 가중해 청년 채용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엄포를 놓고 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나라든, 좁은 일자리를 두고 신구 (新舊) 세대가 쟁투를 벌이는 현상이 목격된다. '사회적' 정년을 늘릴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정년을 기점으로 삶을 한 덩어리에서 두 덩어리로 나누는 것. 다시 말해 인생 곡선을 바꾸는 것이다.
▲ 두 개의 인생곡선 생애 주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삶의 모양이 바뀐다 |
ⓒ 문진수 |
이 그림은 두 개의 다른 인생 곡선을 그려본 것이다.
파란색 실선이 우리가 아는 곡선, 빨간색 점선이 새로 그린 곡선이다. 20세부터 10년을 준비해 첫 번째 인생을 살고, 50세부터 다시 10년을 준비해 두 번째 인생을 산다는 시나리오다. 60세를 기점으로 놓고 보면 두 곡선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전자(단봉)는 내리막의 시작점이지만, 후자(쌍봉)는 오르막의 출발점이다. 어느 선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속도가 달라질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봉우리가 하나뿐인 단봉낙타 상(像)에 맞추어 살기 마련이다.
포물선의 꼭짓점(60세)을 지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는 것. 전반부의 성공 여부가 후반부의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될 거라는. 따라서 전반부 동안 최대한 많은 식량을 창고에 쌓아 두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돈을 버는 일에 매진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위험인 시대가 도래한 탓이다.
은퇴한 시니어 100명의 인생 궤적을 살펴보았는데, 90명은 파란색 실선을, 10명은 빨간색 점선을 따르고 있었다. 연역하면 약 1할의 사람들이 기성의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 항로를 걷고 있는 셈이다.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전체 낙타 개체 가운데 쌍봉낙타의 비중이 10%라는 사실과 묘하게 닮았다. (쌍봉낙타는 단봉낙타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극한 상황을 견디는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흐름은 '개인의 실존적 결단'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궤적을 따라 걷는 이가 늘어나면 인생 항로의 새로운 표준(new normal)이 만들어진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미 변화는 시작된 걸로 읽힌다. 전반부보다 훨씬 왕성한 에너지로 후반부 삶을 개척해 가는 중장년층이 빠르게 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시니어들은 이제 '사회적 돌봄'의 대상이 아니다.
국가는 이 변화에 잘 대응하고 있을까.
최근 발표된 노인 정책 중 가장 황당한 버전은 '은퇴자 해외 이민 보내기'다. 생산가능인구(분모)가 줄어드니 비생산 인구(분자)를 국외로 보내자는 아이디어인데, 지금 우리나라 시니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 미래의 노인 세대가 현재의 노인층보다 부유할 거라는 가정도 터무니없다. 국책 연구기관이 내놓은 대안이 이 수준이라니, 현실 인식도 사회적 상상력도 남루하기 짝이 없다.
부(富)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 은퇴자의 지형은 '돈 걱정 없이 사는' 10%와 '너무 오래 살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90%로 나뉘어져 있다. 해외 이민을 떠날 물질/정신적 여유를 가진 집단은 누구인가. 상위 10%다. 나머지 90%는 이민을 꿈꿀 여력이 없다. 상위 10%가 이민을 떠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국내에서 쓸 돈을 해외에서 쓰게 된다. 이들이 국내에 남아 소비하는 것이 국가 경제에 훨씬 도움이 된다. 중학교 3학년이면 아는 경제 상식이다.
2024년은 우리나라 역사에 기억될 만한 한 해가 될 것이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인구가 정점을 찍는 시점이 올해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는 5167만 명이고, 2024년 예상 인구수는 5175만 명이다. 올해를 기점으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2030년은 5131만 명, 50년 후인 2072년은 3622만 명이 될 걸로 예측된다. 1977년의 인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구감소는 피할 수 없는 미래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인구감소 자체보다 그에 따른 대응 전략을 고민해야 할 때다. 아직 본격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주제가 있다. '줄어든 인구 안에서 어떻게 생산성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의제다. 분자에 속한 비생산 인구를 분모로 돌려 생산가능인구를 늘리는 방안을 말한다. 은퇴자 해외 이민 보내기의 반대 '버전'이다.
노년기에 접어든 국민이 최소한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일차적 책임은 국가에 있다. 당신이 지금 정년과 은퇴라는 변곡점을 앞두고 있다면,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고 나라에 세금을 성실히 낸 정직한 시민으로 살았다면, 그럼에도 앞에 놓인 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라면,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두 번째 봉우리를 오르는 이들을 위해 국가가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정년이 지났어도 생산적 활동을 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는 중장년이 넘쳐난다. 이들을 생산가능인구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된다. 하루 3시간씩 근무해 월 27만 원을 받는 공익형 노인 일자리 수준의 볼품 없는 대응이 아니라 크고 담대한 규모의 일자리 뉴딜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 연령대별(55∼64세) 인구수 통계청 (2021년 기준) 인구통계 편집 |
ⓒ 문진수 |
해마다 8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작은 배에 몸을 싣고 거친 바다로 나아간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삼촌, 어머니이자 이모인 혹은 친구이며 이웃인 이들이다. 국가는 이들이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도록 '등대'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방향을 알려주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나침반과 지도가 필요하다. 생애 곡선이 바뀌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은퇴(retire)란 차에서 내릴 때가 아니라 바퀴(tire)를 갈아(re) 끼울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문진수 시민기자는 최근 단행본 '은퇴의 정석'(2024.6.28/한겨레출판)을 출간했습니다. 이 기사는 책의 내용을 일부 인용, 재편집해 새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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